아내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똑같은 감상을 쏟아냈다. 아내의 얼굴엔 희열이 가득했다. 나 역시 흐뭇한 만족감이 온몸에서 배어 나왔다. 우리 부부보다 더 즐거웠던 이는 아들이었다. 아들은 공연 내내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발레를 몰라도 이렇게 느낄 수가 있구나.'
우리 세 식구의 생각은 같았다.
2023년 12월의 두 번째 토요일. 국립발레단이 겨울 시즌에만 선보이는 차이콥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의 첫 번째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두 달여 전 예매 시작 시간에 딱 맞춰 발 빠르게 박스석 3자리를 예매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두 번째로 비싼 자리였는데, 예상보다 저렴했다. 좀 알아보니 국립발레단은 국가가 운영하는 예술단체로, 민간예술단체보다 공연료를 20~30% 저렴하게 책정한다.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많은 국민이 예술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셈이다.
나 같은 범인이 볼 때 국립발레단의 수준이 꽤 높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리나 강수진 씨가 2014년부터 국립발레단장이다. 인과관계가 전혀 없진 않을 것이다. 국립발레단이 하는 공연은 무조건 보러 가야 한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지휘자 정명훈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떠올랐다. 당시 서울시향 공연을 직접 본 적은 몇 번 안 되지만, 수준과 명성은 자자했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을 지휘할 때 정명훈의 섬세하면서도 묵직한 카리스마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호두까기 인형은 우리 가족의 세 번째 관람이다. 유니버설발레단 공연과 이름은 기억나진 않지만 강동아트센터에서 했던 호두까기 인형 그리고 국립발레단까지. 공연 관람 제한 나이를 생각하면 2년에 한 번씩 호두까기 인형을 본 셈이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아들은 아기일 때부터 호두까기 인형 이야기를 좋아했다. 집에 있던 몇 안 되는 책 중에 하나가 호두까기 인형이었고, 몇 개월 만에 너덜너덜해져 하나 더 샀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책이 두 번째 산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박스석은 아들을 위한 자리였다. 지난가을 오스트리아 빈 오페라하우스에서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봤는데, 그때 로지(Lodge) 석이었다. 로지석은 방처럼 칸이 나눠져 있는 발코니석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급하게 예매하는 바람에 시야가 불편했고, 아들은 두고두고 자리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의 박스석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일반석과 달리 독립된 좌석이어서 좌우 옆 사람과 부딪힐 일이 없고 앞뒤 공간도 여유 있었다. 움직임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박스석이 좋다. 우리는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관람했고 아들은 온몸으로 감동을 표현하며 공연을 즐겼다.
1부 마지막 음악은 '눈송이 왈츠'였다. 발레리나들의 군무는 말 그대로 예술이었다.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만든다. 눈송이처럼 가볍고 순수하게, 그러면서 우아함을 표현하는 연기는 관람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서 근육질 발레리노들이 보여준 군무와 상반된 감동이었다. 매튜 본의 연출이 현실 세계라면 눈송이 왈츠는 천상계였다. 특히 '아~~~ 아~~ 아~~ 아~아~'로 흘러나오는 합창은 눈송이와 함께 하늘을 나는 환상을 심어준다.
아들은 호두까기 인형 중 '행진곡'을 좋아한다. '딴! 따라 딴딴 딴따단~~'으로 이어지는 경쾌한 리듬감에 아들은 춤까지 흉내 낸다. 아내가 좋아하는 '꽃의 왈츠'는 누구나 꿈꾸는 그런 크리스마스를 떠오르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호두까기 인형 발레 모음곡만큼 그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음악이 있을까?
"차이콥스키는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었을까."
아내는 답변을 원치 않는 질문을 던졌다.
차이콥스키의 다른 음악은 러시아의 겨울처럼 차갑지만 웅장함을, 때로는 우울함마저 느껴지는 글루미한 느낌을 받는데, 호두까기 인형 발레 모음곡은 그런 차이콥스키의 감성과는 정반대다. 그가 '꽃의 왈츠'의 악상을 떠올릴 때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물론 나는 피아노의 'P'자도 모른다.
우리는 인터미션 때 매표소 앞에서 판매하는 장식용 호두까기 인형을 샀다. 호두까기 인형은 지난 2022년 늦가을 이탈리아 로마 여행 때 아들이 갖고 싶었던 장난감이다. 당시 우리 부부는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프랑스 파리에서 사주겠노라고 장담했는데, 정작 파리 유명 백화점에서는 호두까기 인형이 없었다. 1부 공연이 끝나고 로비로 나오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호두까기 인형에 우리 세 식구는 그대로 직진했고 무려 2개나 샀다. 공연의 감동이 소비를 부추겼다. 온라인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크기와 모양이었다. 공연과 선물까지 30여만 원에 우리 세 식구는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들은 한동안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을 '1일 1 관람' 했다. 나는 국립발레단의 감동을 좀 더 느끼고 싶었다. 유튜브로 검색하다 뜻밖에 멋진 공연을 찾았다. 201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극장이던 '마린스키 극장(Marilinsky Theatre)'에서 펼쳐진 마린스키발레단 공연이었다. 마린스키발레단은 러시아 볼쇼이발레단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단이다. 실제로 차이콥스키가 발레 안무에 관여한 곳이 마린스키발레단으로 알려졌다. 아들이 1시간 43분 짜리 풀버전을 즐기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10번 이상은 본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고 싶어졌다.
아들은 여전히 호두까기 인형을 좋아한다. 우리 집은 TV가 없는 대신 오디오로 음악을 틀어 놓는다.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네임 뮤조2(Naim Audio Muso2)를 샀다. 그전에는 입문용으로 제작된 북쉘프 스피커와 온쿄 인티앰프, 마란츠 플레이어를 사용했다. 현실적으로 하이엔드로 넘어가기 어려워 네임 뮤조2를 선택했는데, 현재까지 만족감이 높다.
내가 한 번씩 휴대전화 블루투스로 오디오를 연결해 마린스키발레단 공연을 틀면 아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에게 달려온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행진곡'이 나올 때는 안무를 제법 잘 따라 한다. 제목은 몰라도 그다음에 어떤 음악이 나올지도 안다. '발레는 좋은데 배우는 것은 싫다'고 했다. 10살 아들의 마음에 '발레는 여자들의 무용'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겨 아쉽고 안타까웠다. '남자도 핑크색을 좋아하고, 여자도 파란색을 좋아할 수 있다'라고 가르쳤지만 사회적으로 학습된 생각을 밀어내긴 역부족이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