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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Apr 16. 2024

김나현 <오늘 할 일> 비평

해체론에 입각한 ‘일상’의 해체



  철학과 비평에서 쓰이는 ‘해체’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하나의 단어, 주제 등을 다각도에서 뜯어보겠다는 말이다. 그 단어가 원래 쓰이던 의미나 맥락, 주제의 원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해도 상관이 없다. 해체를 거쳐 탄생한 의미들은 새롭고 이상하며 비판적·사회 전복적 에너지가 깃들어 있다.

  김나현의 <오늘 할 일>은 부부의 일상을 다루는 소설이다. 제목부터 무언가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아주 이상한’ 일까진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도 그렇다. ‘나’와 남편인 ‘선일’에게 환상적인 사건이나 모험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평화롭지도 않다. 그들의 오늘들은 매번 불편하고 어딘가 침해당하는 듯하다. 하지만 부부의 오늘들을 ‘일상’이라고 명명한 것이 어색하다고까지 느껴지진 않는다. <오늘 할 일>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일상’을 비롯한 단어들의 본래 쓰임, 뉘앙스가 소설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들과 미묘한 간극을 가지고 있다. 해체의 대가 자크 데리다는 ‘해체의 가능성은 우리가 텍스트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내가 이 텍스트에서 수행할 해체의 작업은, 내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오늘 할 일>이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 포함된 인용들은 '소설 보다: 봄 2023'의 페이지 표기를 따른다.)




  사실 소설이 직접 일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언급되는 것은 ‘오늘’이다. 제목 ‘오늘 할 일’, 곧 ‘오늘’이 될 내일의 할 일을 다이어리에 적는 행위, ‘오늘 어땠냐.’는 물음, ‘어제와 비슷한 오늘도 괜찮은 것인지 아무에게나 묻고 싶었다.’는 문장. 오늘들의 중첩은 일상이 된다. ‘나’는 요새 지나온 오늘들, 즉 최근의 일상이 예상과는 너무도 다르게 흘러갔다고 생각한다. 선일은 갑자기 1년의 갭이어를 선언했고, ‘나’ 일은 잘 풀리지 않는다.

결혼 후 처음으로 선일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리는 상대가 원하는 답을 하지 않으며 서로의 말을 튕겨냈다. (p.85~86)

 ‘나’는 다이어리에 ‘오늘 할 일’의 이름으로 내일의 계획을 쓰기 시작한다. 다이어리를 사온 것은 선일이지만 그것을 쓰고, 또 선일 역시 쓰게끔 하는 주체는 ‘나’이다. 그것은 ‘나’가 일상의 도래(혹은 재림)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이 어떻기에? 여기서 ‘일상’이라는 단어의 재정의, 해체가 요청된다. 일상이라는 말은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일상은 하루하루의 누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에는 ‘무탈’의 뉘앙스가 있다. 일상에 잘 붙는 수식어로는 ‘평범한’, ‘평화로운’, ‘무탈한’ 등이 있다. 어딘가 목가적인 느낌마저 주곤 한다. 다사다난한 상태를 일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상이란 일이 적당히 잘 풀리고 걱정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어떻게 본다면 일상이라는 말에는 평화를 향한 주술적 바람이 깃들어있다.


  그러나 일상을 바랄수록 깨닫는 것은 일상의 괴물성(데리다가 언급한, 괴물같이 낯설다는 감각)불가능성이다. 소설의 ‘나’의 일상은 불편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하루는 어떤 거대하고 불가해한 힘, 사회, 체제, 담론, 이데올로기 등의 작동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 선일의 달라진 일상은 분명 그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선일이 직장을 그만둔 것은 ‘나’에게도 변화를 가져온다. ‘나’는 선일을 어느 정도 원망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선일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다.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잘못은…… 선일에게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할 수 있나? (p.98) 

그렇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또한, 그렇다고 일상이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니다. 불안하고 두렵지만 부부의 삶은 여전히 일상의 범주에 들어있다. 어디까지가 일상이고 어디부터 비일상인가. 그 경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일상에 깃든 괴물성이다. 일상은 우리의 곁에 있다. 그러나 한없이 낯선 괴물과도 같다. 결국 일상이라는 말은 끝도 없이 침해당하고 있다. 애당초 현대인에게 평범한 하루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일이 겪은 부당한 일이 아주 극적이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연으로는 다가오지 않는 것이 그 예이다. 우리는 누구나 억울하고 거북하며 무언가를 걱정한다. 출퇴근하는 현대인들이 수행하는 업무의 강도는 그들이 바라는 ‘평범한 일상’의 그것보다 언제나 더 많다. 그렇게 본다면 일상의 이러한 괴물성, 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를 침해하며 속이고 있다.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정도면 일상적이다(평범하다)’는 사회적인 약속과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참고 견디고 망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상은 환각이며 꿈이자 종교이다.




  일상의 주요 구성물은 지인들이다. 배우자, 부모, 친구, 직장상사나 동료들 모두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포함된다. 일상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개념이라면, 그것의 부분들인 ‘지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 팀장은 그러한 괴물성의 훌륭한 예시이다. 그는 익숙함과 낯섦을 이편저편으로 오간다. 그는 실없는 얘기를 하며 ‘나’에게 은은한 불쾌감을 선사하며 ‘나’를 꾸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은 백 팀장뿐이고, ‘나’를 질책하는 그는 틀린 말이라곤 하지 않았다. 그는 내연녀를 뒀다가 이혼을 당해 모텔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는 모텔 옆방의 아이들을 딱하게 여겨 라면을 가져다 두었다. 그는 그의 도둑질을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이를 목격한 청소부에게 족발과 술을 사주었다. 그가 도둑질한 물건이란, 자기가 놔둔 그 라면이다. 백 팀장 같은 사람은 우리 주위에 흔하다. 우리는 긴 세월 함께한 부모나 친구에게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끝도 없는 괴물성이다. 지인들이 익숙하다는 생각은 찰나의 착각, 가짜에 불과하다. 동시에 지인이 낯설다는 생각도 찰나의 착각, 가짜에 불과하다. 곧 낯설어질 것이다. 곧 익숙해질 것이다. 백팀장은 악인인 동시에 호인이고, 도둑인 동시에 도둑질한 물건의 원래 주인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과연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게으른 듯 하지만 어느새 주어진 일을 능청스럽게 해내고,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농담을 던지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누구와도 적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처럼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고 싶다 한들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 자명해 보였다. (p.109)


  ‘나’는 선일의 회사를 그만둔다는 말에 충격을 받으며 사기 결혼이라고도 생각한다. 그의 실속 없어 보이는 하루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즉, 선일은 낯설다. 그러나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미래를 의논하는 것은 그 뿐이다. 종종 그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즉, 선일은 익숙하다. ‘나’의 일상에는 선일의 영향이 배어있다. 그 영향의 결과가 전혀 원하지 않던 방향일 때는 ‘나’는 마치 선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과 같다. 

해가 바뀌어 선일이 회사를 그만둔다 했을 때, 나는 코를 얻어맞은 듯 얼굴이 얼얼했다. (p.83) 

그러나 선일의 일상 역시 누군가로부터 영향력을 행사당한 결과물이다. 어쩌면 일상의 불가능성, 괴물성은 여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선일은 일을 지시한 팀장과 돈을 쥐어준 구청장으로부터 일상의 침해, 침입을 받았다. 그러나 일상은 이내 침입들마저 수용하고 만다. 그런 일들조차 일상의 이름으로 쓰인다. 그리고 선일의 ‘일상의 침입에 대한 수용’은 곧 배우자인 ‘나’에게 또 다른 수용을 강요한다.




  일상의 침해는 능수능란하게 벌어진다. 실상, 일상이 침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침해당하는 것이 곧 일상이다. ‘내 일상은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가? 정녕 내가 전적으로 원해서 진행하고 벌려놓은 일들인가?’ 그 근간을 찾아 올라가는 행위에 결론이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일상 침해의 명확한 주체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은폐되었거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며, 혹은 애초에 형체가 없다.

  이데올로기 비평의 유행은 끝났다. 이제 비평가들은 작품에서 어떤 절대 악, 절대적으로 부당한 사회 시스템이나 기관, 관습, 즉 이데올로기를 짚어 그것에 입각하여 비평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일까? 사회구조나 정치 이념이 우리를 압박한다는 비판이 이제는 유치해졌을까? 실상 그런 것들은 없을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미세하게 녹아들었을 뿐이다. 너무 작고 교묘한 나머지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그 영향을 깨닫지도 못한다. 따라서 하나의 거대하고 단일한 형체로서 침해의 주체를 잡아내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 선일의 일화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팀장이나 구청장은 이데올로기의 끝에 서있는 사람들일 뿐, 선일의 일상을 침해한 진범들이 아니다.


  다만 침해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적법하게 보장받는 경우가 존재한다. 바로 보상금을 받는 경우이다. 시시비비를 가린 끝에 얻는 합의금이나 배상금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국가가 개인의 일상을 침해했음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식으로 보상금이 주어진다. 침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며, 국가가 직접 정한 액수라는 점에서 더욱 공정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침해에 대한 온전하고 합리적이며 납득 가능한 보상’이란 과연 가능한가? 선일의 일화를 보자. 선일은 팀장의 지시대로 일을 처리했을 뿐임에도 부당한 처우를 받고, 일에 열의를 잃어 1년의 갭이어를 선언했다. 처음으로 오전을 집에서 보내게 된 그를 반기는 것은 들었던 바 있는 비행기 소음이다. 그러나 피해보상센터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신청기간이 마감되어 보상금 지급이 어렵다는 말이다.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선일은 동네 주민들의 조언에 따라 구청장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고, 모든 일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구청장은 보상금이라고 생각하라며 5만원 지폐 두 장을 준다. 더 필요한 일이 있다면 구청 대표 전화로 연락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보상금이라는 말에 깃든 괴물성과 마주한다. 찬찬히 뜯어보자. 보상금을 지급하는 원인을 고려하였을 때 신청기간이 마감되어 지급할 수 없다는 말에는 지독한 부당함이 깃들어있다. 보상금을 받는 것은 무언가 침해받았기 때문이다. 정작 그 침해는 기간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보상금은 신청기간을 따져야 하며 기간이 마감되면 침해를 당하더라도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결국 보상금을 지급하는 이들은 진정으로 보상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보상하고자 한다면 다른 조건 없이 침해가 곧 보상으로 이어져야만 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보상금의 목적은 보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선일은 곧장 피해‘보상’센터로 안내받는다. 같은 동 주민들은 보상금에 대한 정보 제공은 물론이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후속조치조차 제공한다. 보상금과 관련된 일의 진행은 편하고 매끄럽다. 보상의 존재를 알게 된 선일은 자연히 이에 몰두하게 된다. 그의 행동 동력이 ‘일상을 침해 받았다’에서 ‘보상금을 받는다’로 바뀐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무엇인가? 보상금이 목적이기 때문에 보상금을 받고 나면 이제 입을 다물어야 한다. 목적이 완수되었는데 더 왈가왈부 할 수 없다. 

그 말을 들은 후 선일은 구청장이 건넨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차에서 내렸다. 인사도 없이 돌아섰지만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p.130) 

보상금을 뱉어내고 다시 침해의 책임을 따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면 보상금을 받는 행위에는 n만큼의 화폐를 획득한다는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현재까지 받은 침해와 앞으로 받을 침해를 보상금을 대가로 ‘수용’하겠다는 무언의 사회적 함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돈을 다시 돌려놓더라도 수용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용서했던 사실을 없던 일로 하기가 어려웠던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다시 입을 열지 말 것, 침해를 수용할 것, 같은 종류의 침해가 이어지더라도 그렇게 할 것. 보상을 제공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보상은 폭력과 다를 바 없다. 왜 폭력인가? 첫째로, 위에서 언급했듯 기한과 지급방법이 지불하는 이들에 의해 정해져 있다. 기한과 양식을 맞추지 못한다면 침해를 받거나말거나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 그때부터 ‘보상을 받지 못함’은 피해자의 책임과 어리석음으로 떠넘겨진다. 둘째로, 보상의 금액을 정하는 것 역시 침해하는 주체들이다. 침해한 자들이 침해의 깊이를 어떻게 헤아린단 말인가? 그렇기에 보상금은 언제나 가해진 침해에 미치지 못한다. 보상은 언제나 보상이 되는 것에 실패한다. 개인마다 받아들이는 침해의 정도와 심각성은 다르지만 보상금의 액수는 일괄적이다. 침해에 대한 보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괄적인 액수로 주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관료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셋째로, 결국 돈은 침해당한 사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선일은 글 쓰는 것에 방해를 받았다. 돈을 받거나 받은 돈을 어디에 지불하더라도 못다 쓴 글이 다시 써지진 않는다. 사실 돈은 문제의 직접적인 해결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건 어떤 돈인데요?”
  “돈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선일은 없는 답이라도 지어내라는 듯 구청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보상금이라고 해두죠.”
  “무엇에 대한 보상인데요?”
  “당신이 바라는 것에 관한 보상이라고 해야겠죠. 그걸 제가 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p.123~130)

  선일은 구청장으로부터 5만원 지폐 두 장을 받는다. 이는 보상 개념의 괴물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순간부터 선일은 비행기 소음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 건네받은 10만원이 충분하든 그렇지 못하든 말이다. 10만원이라는 액수를 결정한 것은 선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해심 많고 관용을 베푸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구청장이다. 선일조차 이를 받아들였다. 

  “구청장님은 좋은 분 같습니다.”
구청장은 바로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p.124) 

다만 가능한 것은 홈페이지에 안내된 구청 대표 전화로 연락하는 것뿐이고, 선일은 아마도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들(신청기간이 만료되어 올해는…)을 듣게 될 것이다. 구청장의 검은 차는 일종의 환상적인 공간을 구성한다. 그곳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결정권자(구청장)와 직접 대면할 기회가 주어진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다. 그러나 깨닫는 진실은, 그가 선일의 일상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선일의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는 선일을 복직시킬 수 없으며 절차를 거스룰 수도 없다. 결국 그는 힘도 의지도 부족하다. 환상이 꺼지고 남은 것은 지폐 두 장뿐이다. 

선일은 구청장이 자신에게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내심 기대했다.
  “우리 구청 대표 전화는 홈페이지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p.130)

문제의 지폐 두 장은 선일 본인에 의해 ‘보상금 같은 돈’이라고 언급된다. 그렇다면 그와 대비되는 ‘진짜 보상금’이란 존재하는가? 모든 보상금은 본질적으로 불충분하며 보상하지 못한다. 결국 모든 보상은 ‘보상금 같은 돈’일 뿐이며, 보상이란 또 다른 환상이자 꿈에 불과하다.

  보상 역시 일상처럼 불가능한 개념이다. 보상은 ‘충분히 보상될 수 없음’과 ‘다시 요구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일상의 침해는 ‘복구가 불가능한 손상’이다. 보상을 받더라도 절대 침해받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일상을 침해당한 개인은 보상금과 관련하여 진퇴양난의 상황과 맞닥뜨린다. 보상금을 받지 않으면 존재하는 보상을 굳이 받지 않았으므로 그것 자체가 불합리의 수용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보상금을 받으면 명백하게 합의한 것이 된다. 보상금은 보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차라리 합의 혹은 폭력이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사실은 침해를 덮어두고 보상을 받아들인 이후의 삶 역시 ‘일상’의 이름으로 쓰일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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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주된 소재인 다이어리는 ‘나’가 불안정한 일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바라는 일상을 되찾으려고 한다. ‘나’의 쓰는 행위는 정확히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는 것이다. 저녁마다 전날 저녁에 작성한 ‘오늘 할 일’을 잘 완수했는지 확인하고, 곧 내일이 될 ‘오늘’의 ‘할 일’을 적는다. 이것은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일상을 자신이 바라는 쪽으로 고정하려는 행위이다. 일상의 낯선 괴물성을 친숙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이다. 다음날에 대한 계획은 일상이라는 종교적 꿈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부부의 ‘오늘 할 일’ 어떻게 되는가? 언제나 실패한다. 일상을 고정하려고 할수록 깨닫는 것은 일상의 불가능함뿐이다. 다이어리를 살펴보자. ‘나’는 ‘출근길 책 읽기’와 ‘바닐라라테(마시기)’, 마지막은 달리 떠오르는 계획이 없어 회사일인 ‘반드시 업체 확정’을 쓴다. 선일은 ‘원고지 30매(쓰기)’, ‘3킬로미터 달리기’, ‘장보기’를 계획으로 삼았다. 여섯 개의 계획 중 달성되는 것은 ‘바닐라라테’ 뿐이다.


  이들 중 ‘출근길 책 읽기’와 ‘3킬로미터 달리기’, ‘장보기(즉 사먹지 말고 해먹기)’의 공통점은 계획 작성자의 의지에 달린 일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쉬워 보이지만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면 좀처럼 꾸준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출근길 책 읽기는 실패였다. 가방에 책을 챙겨 오지 않은 탓이었다. (p. 88)

그러나 계획 실행의 실패를 개인에게 온전히 전가하는 것은 정당할까? 이 계획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사회가 장려하는 덕목이라는 것이다. 꾸준함, 성실함, 건강함, 자기개발 등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주체가 생계를 위한 일만 완수하기에도 벅찬 공간이 아닌가. 매일 3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모든 생계활동, 경제활동을 완수한 후 개인적이고 사적인 꾸준함, 성실함을 추가로 발휘하여 3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이상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일상에는 이러한 근면성실, 자기개발이 포함된다. 이미 불가능한 일상에 이러한 의지와 노력까지 요구하는 것이다. 말했다시피 일상은 괴물이다. 그러나 매일 마주하는 괴물이다. 일상의 이상함, 괴물스러움, 낯섦은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칠칠치 못해서’, ‘내가 부주의해서’, ‘내 의지가 부족해서’라고 스스로를 탓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반드시 업체 확정’은 작성자인 ‘나’가 직장에서 완수해야 하는 일이다. 즉,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계획이 아니라 지적을 받지 않고 제 몫을 해내기 위해선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회사 일이 개인적인 ‘오늘 할 일’에, 내일의 계획에, 나의 일상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인가? 심지어 보다 개인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일들(출근길 책 읽기, 3킬로미터 달리기, 장보기)보다 우선일 수 있는 것인가? 왜 그러한가? 곰곰이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누구나 마지못해 일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현대인에게 직업이란 그런 개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으로선 자신이 몸담은 기관 혹은 기업이 진행하는 일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지런하거나 게으르거나 결과는 마찬가지이기에, 노력은 무용한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가 미물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업무를 우선시하는가? ‘나’로 하여금 일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다면 최소한의 책임감일까? 이것은 이 텍스트에서 논하기에는 또 다른 거대한 주제이다. 다만, 출근하고 근무하고 퇴근하는 일상은 괴물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반드시 업체 확정’은 실패한다. 그 일은 며칠 후에 백 팀장의 도움을 받으며 일단락된다. 일상의 괴물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결론적으로 ‘나’의 계획 세우는 행위는 일의 진행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기업은 돌아간다. 그럼에도 당신은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누가 당신을 채찍질하는 것도, 해냈다고 대단한 성과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원고지 30매’는 다소 애매하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달린 일인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1년간 글을 써보기로 한 선일에게는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오늘 할 일’에 포함될 수 있는가? 계획에 포함시킬 것도 없이 당연히 해내야만 하는 일이 아닌가? 이 계획은 비행기 소음에 의해 방해를 받고, 선일은 소음 보상금이라는 전혀 엉뚱한 일에 몰두하게 된다. 어느새 글 쓰는 것은 뒷전으로 밀렸다. 계획은 언제나 실패한다. 성공하는 것은 계획하지 않은 것들뿐이다. 심지어 실패하는 것은 계획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아무것도 안 했어?”
내가 묻자 선일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바빴어.”
  “뭐가 바빠?”
그렇게 물으면서 나도 그랬다고, 왜 계획대로 되는 건 바닐라라테 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p. 95) 

자연히 놔두면 실패할 테니 계획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계획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서려 있다. 여기 계획 실패의 훌륭한 예시가 있다. 이 단락에서 나는 일상을 해체하는 작업을 수행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계획을 해체하여 계획의 괴물성을 발견하고 있다. 내 계획은 단기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일상의 계획’은 일상만큼이나 괴물성을 가진다.




  성공하는 것은 계획으로 봐주기도 어려운 것인 ‘바닐라라테’뿐이다. 계획보다는 단순한 소비, 욕망의 발산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계획의 역설이 계속 적용되고 있다. 계획은 실패를 전제로 하며, 계획하지 않은 것(계획 같지 않은 것)이 달성된다. 김 대리에게도 한 잔 선물한 바닐라라테는 ‘나’에게 위안이 된다.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사소한 성공들이다. 계획하지 않은 크고 작은 성공들, 다이어리에 적음으로써 계획으로 위장한 소비, 욕구, 욕망들.

  “바닐라라테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 같아.”
선일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p.131)

선일이 사온 오도로초밥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장보기’라는 계획의 실패인 동시에 ‘보상금 수령’이라는 목표의 실패가 빚은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다. 5만원 지폐 두 장이 보상금의 폭력과 불가능성을 상징한다면, 오도로초밥은 그것을 개인의 사적인 기호(嗜好)로 변환시킨 것이다. 부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보상금 같은 돈’이 아니라 그 돈을 맘대로 소비해 사온 오도로초밥이다.

어느새 오도로초밥은 한 톨 남김없이 우리의 배속에 들어가 있었다. (p.131)

그리고 ‘나’가 임신 중이라고 오해한 백 팀장이 보내온 입덧 사탕 사진이다.

샛노란 알사탕 사진을 보자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p.132)

  일상은 괴물이다. 불가능하고 불충분하고 결핍이며 고통이다. 그러나 종종 뜻하지 않은 충동과 의외들이 위로가 되어주곤 한다. <오늘 할 일>에서 위로가 되는 음식이나 기호품들은 대중들이 인식하는 상징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커피가 아니라 ‘바닐라라테’, 외식이나 초밥이 아니라 ‘오도로초밥’, 디저트나 사탕이 아니라 ‘입덧 사탕’.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개인적인 것들뿐이다. 그것만이 우리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하나, 여태까지 이 텍스트에서 지금까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작은 안식들도 일상은 포함한다. 때로는 계속해서 곱씹을 수 있는 순간들이 된다. 어쨌거나 일상은 일상이다. 생각보다 너무 낯설게 흘러가는 경우는 잘 없다. 일상이 불충분하고 불가능하고 불만족스럽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순간들을 우리는 종종 마주하곤 한다.

  급격하게 나빠지긴 잘해도 급격하게 좋아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저러나 우리는 긍정하는 법을 배운다. 식탁은 모서리에 상처가 나도 제몫을 한다. 다가올 계절은 믿어지지 않지만, 봄은 언젠가 올 것임을 '나'는 믿는다.


  선연하게 남은 그 자국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식탁이 원래의 식탁과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빌라에 살던 시절 그런 것처럼, 우리 부부는 그 식탁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시답지 안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 식탁에는 환한 속을 펼쳐 보인 다이어리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오직 감상될 목적으로 거기 있는 것처럼 한동안 바라만 보았다. 그것은 가능성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속에 두서없이 할 일을 욱여넣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백지로 남길 수도 있었다. (…) 발을 들어 올리면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도 괜찮은 것인지 아무에게나 묻고 싶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눈앞에는 없었다. 정말로 오긴 오는 것인가. 다가올 계절이 아직은 믿어지지 않았다.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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