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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Nov 18. 2022

속도와 감각에 스러지는 나의 생각

감각과 생각은 공존할 수 없다

로스쿨 입학 전에 몇 달간 열심히 연습한 것이 하나 있는데, 영타다. 영타를 못 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판을 보고 치는 수준이었는데, 모든 것을 타이핑으로 처리해야 하고 타이핑에서 밀리면 수업도, 시험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그리고 사실 입학 전에 미리 준비할 것도 없다고 해서, 영타라도 연습하기로 한 거다. 


처음에는 자판을 보지 않고 치는 연습을 하고, 다음에는 타자 연습용 게임도 하고, 자판을 보지 않고도 타이핑이 가능해진 후에는 속도, 속도, 속도… 오직 속도를 높이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학생 시절 의대에 진학했던 친구 한 녀석이 기말 고사때에는 쓸 내용이 많아서 빠르게 쓰는 연습이 시험 공부 중 하나라고 해서 그게 무슨 시험 공부냐며 비웃었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같은 일을 하게 될 줄이야.


그런데, 막상 로스쿨 수업시간에 보니, 모두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와서 수업을 듣기는 했으나, 학생들 중에 생각보다 '독타'가 많았다. 아니, 캐나다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고 자란 컴퓨터 세대가, 대학에서 학점도 잘 받았을 로스쿨 입학생이, 어떻게 로스쿨 올 때까지 독수리 타법을??? 그렇다고 한국의 엄지족처럼 두 손가락으로 번개같이 타자를 치는 것도 아니다. 느릿느릿 - 내 타이핑 속도의 반도 안 되어 보인다. 


저렇게 쳐서야 로스쿨 시험 3시간 안에 써 내야할 것들을 다 써낼 수 있을리 만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나보다 학점은 좋다. 


고민하지 않아도 이유는 알 수 있다. 빠르게 쓰는 것보다 무얼 쓰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빠르고 많은 타이핑 안에는 점수를 받을 만한 것이 없었으니 그렇다. 무엇을 쓰는지를 생각하려면 손 끝에 의존하기 보다는 생각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 나는 시험 답안을 손으로 쓰는 것을 선호한다. 타이핑을 하다보면 손가락으로는 하지 않을 실수들을 많이 하게 된다. 예를들면 tried/tired, sign/sing 과 같은 것들이다. 손으로 쓸 때는 생각을 쓰는 것이니 이런 일이 거의 없지만, 타이핑은 생각과 따로 노는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 


방향이 아니라 속도에 집중하다보면 감각이 생각을 지배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즘은 이메일이나 문자를 주고 받으면서도 웬만한 오타는 머리의 실수가 아니라 손가락이 하는 실수라고 관대하게 넘어가는 추세다 - 그래서 이메일에, 문자 메시지에 오자, 탈자, 속어가 난무해도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계속 받아들이다 보면 생각의 지배를 받아야 할 영역에서 감각의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남에게 관대해지다보면, 나에게도 관대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게 좀 걱정된다. 생각이 줄어드는 것에 관대해질까 염려된다. 


생각과 감각은 공존할 수 없다


속도로부터 나의 생각을 지켜야겠다. 감각과 생각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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