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에게 거는 우리의 기대는 매우 낮단다

무시당하는 기쁨

by 신광훈

기말 고사를 마치자마자 summer student로 여름 인턴을 하기 위해 토론토 집을 떠나 오타와로 갔다. 오타와 대학 기숙사는 여름 방학동안 대부분 비어있기 때문에 여름 방학동안 대실하는 (sublet이라고 한다) 방을 대학 기숙사에 구했다. 한 달에 50만원 정도. 출근 며칠 전에 도착해서 방 정리도 하고 부근 지리도 익혔다. 한인 마트 확인은 기본. 쌀과 라면부터 샀다.


캐나다 와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출근 첫 날, 영어는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하는데 파트너 변호사들이나 Mentor 변호사들이 하는 말을 놓칠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음은 긴장에 또 긴장이다. 우선 회의실에 안내를 받아 함께 뽑힌 학생들과 인사를 한다. 1학년 4명, 2학년 4명. 토론토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밴쿠버 시나 알버타 주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다. 2학년 4명은 작년에 이미 summer student를 한 경험이 있으니 친절하게 1학년들에게 기본적인 회사 생활을 설명해 주어 긴장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함께 뽑힌 동기 여학생 하나가 다시 나를 긴장하게 했다. 무슨 말을 하고 나면 꼭 “Do yo know what I mean?”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직역해서 해석했기 때문에 본인이 말한 것을 내가 알아듣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중 알았다. 무슨 말 하는 지를 내가 못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나..? 싶어 열심히 말로도 몸짓으로도 반응을 했는데도 계속 묻는다 – do you know what I mean? 아, 영어 못 하는 건 어디가도 티가 나는구나 라고 생각해서 기가 죽었더랬다.


이 말이 자기 말을 알아들었냐는 뜻이 아니라 그저 말 끝에 추임새 같이 사용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때는 이 말이 나를 긴장시켰다. 파트너 변호사들이 내가 영어를 너무 못한다고 생각하면 내게 다음 기회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학생들이 모여 있는데 파트너 변호사가 들어와서 로펌의 연혁과 여러가지 자랑거리를 설명하고는 멘토를 소개해 준다. 그리고 여름동안 학생들에게 유용할 팁을 준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치는 매우 낮아. 사실 기대하는 것이 거의 없어


혹시 잘 못 들은 것일까.


기껏 뽑아놓고 한다는 말이 기대하는 게 없다라니. 기대가 낮다면 왜 뽑은걸까. 그래도 나름 대학에서 좋은 석적을 받고, LSAT도 좋은 성적을 받고, 면접에서도 쓸 만하다고 판단했으니 거금을 주고 여름 방학동안 일을 시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시를 당했으니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오히려 안도가 되었다. 아, 법을 잘 아는 것 처럼 보이려고, 일을 잘 하는 것 처럼 보이려고 욕심 낼 필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단체 미팅이 끝나고 각기 자기 방에 배치된 후에는 기다림이 며칠 지속된다. 이미 사내의 변호사들에게는 summer student들이 왔으니 일을 주라는 지침이 몇 주 전에 내려갔지만, 보통은 변호사가 직접 처리하거나 본인 비서에게 시키는 것이 빠르기 때문에, 그리고 새로온 학생들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쉽게 일을 주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주는 일은 보통 변호사가 하기에는 자잘하지만, 비서가 다루기에는 너무 법적인 업무다. 그래서 80%정도의 일은 소위 legal research다. 변호사가 특정한 상황을 주면 법전과 판례와 참고 서적을 뒤져서 상황에 대한 답을 찾아 제출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주더라도 경험있는 2학년들에게 먼저 일을 주고, 2학년이 바빠지면 1학년에게 일을 주게 된다. 그래서 의욕이 가득했으나 아무 일 없이 며칠 씩 사무실만 지키다가 지친 1학년들에게, 처음으로 일거리를 받은 동기는 나름 부러움 (?)의 대상이 된다.


내가 받은 첫 일은 상표법에 대한 legal research였다. Associate 변호사가 아니라 Partner 변호사가 준 일거리라 더욱 신경써서 판례도 읽고 참고서적도 보아가며 정리해서 보고서를 냈다. 며칠 후 해당 변호사가 내가 쓴 보고서를 가지고 상의를 하러 왔는데, 내가 쓴 보고서가 온통 빨간색이다. 저렇게나 많이 수정이 되다니. 아, 내가 legal research를 잘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히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는데, 변호사 말이 research 는 잘 했으나, 영어가 문제란다. 첫 여름에는 캐나다 현지인 학생들도 법률 영어로 고생을 한다고 하면서 (위로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여름에는 수정을 해 주기 위해 시간을 써 주겠지만, 기본적으로 학생이 작성한 보고서를 일일이 수정할 시간이 있는 변호사는 없으니 영어는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인터넷에 공지를 내고 영어 선생님을 구했다. 1학기 내내 영어 과외를 하고, 영어 수업을 듣고, 영어로 토론을 하면서 Listining과 Speaking은 조금 늘었다고 생각했고, writing은 speaking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1세가 로펌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written English를 구사하는 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2명의 선생님 (University of Ottawa의 학생들) 과 함께 여름 내내 writing 연습을 했다.


그 해 여름은 대부분 읽고, 쓰느라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침 7시부터 밤 7-9시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그렇게 해도 동기들이 읽고 쓰는 것을 따라가기에 바빴지만, 적어도 보고서를 제출할 시한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항상 점심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먹었고, 일주일에 한 두 번씩은 축구, freesby, 농구 등 운동을 하면서 다른 학생이나 변호사들과도 어울렸다. 그러면서 조금씩 영어가 느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캐나다 백인들과 업무나 공부 이외의 일과 놀이로 어울리면서 알게 된 것은 캐나다인들이 동양인들의 나이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본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내가 30대 초반인 줄 알았다고 했는데, 그 때 나는 만으로 41살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중국인 동기의 나이도 잘 분별하지 못했다. 나이가 많은 것이 변호사 채용에 걸림돌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나로서는 한 가지 걱정을 던 셈이었다. 어쨌든 나는 나의 실제 나이는 나중에 변호사로 채용될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일단 일이 주어지기 시작하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점점 일이 늘어, 2주나 3주차 부터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렇게 일하고 어울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았는데, 어느 날 학생들을 관리하는 파트너 변호사가 사무실로 부른다. 이번에는 무슨 research일까 생각하고 갔는데, 담담하게 내년 여름에도 일하러 오라고 한다. 아,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벌써 여름이 다 갔구나. 그래도 내가 일단 첫 여름에 짤리지는 않았구나. 내년 여름 summer student 자리가 해결이 되었구나.


가슴이 벅찼다. 바빠서 생각을 못 했지만, 사실 다음 해에 계속 채용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너무 기뻤다. 이제 내년 여름만 잘 버티면 졸업 후 연수생으로 뽑힐 가능성이 커졌다.


그래서 (좀 더 잘 보이려고) 물어보았다. 내년에 회사에 더 도움이 되고 싶은데 2학년 때 어떤 과목을 듣고 오는 것이 좋겠느냐? 특허법이나 상표법이나 저작권법 관련 수업은 들으려고 한다 – 그런데 이 파트너가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거나 듣고 싶은 과목 들어. 뭘 배우든 어차피 로펌에서 할 일은 우리가 새로 다시 다 가르쳐야 해”


정말 로펌은 summer student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무시당하는데도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안도감이 있었던 것은, 내가 그 만큼 자신감이 없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무시 당하는 즐거움이라니.


무시당하더라도 뭐, 어쨌든 내년 여름 자리를 확보했으니 일단은 그걸로 되었다. 차근차근 한 번에 하나씩 성취하면 되는 것 아닌가.

One at a time.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변호사끼리는 싸우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