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연줄 이야기 (1)
나는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혈연, 지연, 학연이 나쁜 것이라고만 배웠다. 책에서도 연줄의 나쁜 점만 부각되어 있었다. 연줄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이고 외국은 실력대로 평가 받기 때문에 부패가 없으며, 우리도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교육받은 바였다. 그래서 한국 회사에 일할 때 어느 임원이 “좋은 조직이란 윗 선을 잡고 쭉 빼내면 그 밑의 라인들이 굴비처럼 쭈욱 빠져나오는 조직”이라고 했을 때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국적 기업으로 전직을 하면서 나는 능력을 기반으로 한 소위 선진 인사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 곳은 연줄 인사가 더 심해서 국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독일 회사이니 독일 사람들을 우선 배려하는 정도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한 나라의 country head라든지 한 품목의 product manager와 같은 자리에 자격이 되지 않아 보이는 인물이 연줄의 힘으로 지명이 되는 경우가 종종 보였다. 본사의 product manager 중 한 사람이 내게 본사나 regional head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줄타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해 줄 때에는 조금 놀랐다.
그러다가 캐나다라는 곳에 오게 되었으니, 기대가 컸다. 이제 능력대로 평가받는 캐나다에서 능력으로만 맞부딪쳐 보자... 라고 생각하고 캐나다에 왔다.
그런데, 웬걸, 캐나다의 연줄 시스템은 한국 회사나 다국적 기업에서 보았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때 학연, 지연, 혈연은 물론 동원할 수 있는 연줄은 모두 동원되며, 이런 연줄이 다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사기업에 자리가 나면 대부분 채용 공고없이 연줄로 추천받아 서류 전형을 하고 면접을 보고 채용한다.
같은 로스쿨 1년 선배인 한 변호사 (하지만, 내가 나이가 훨씬 많아 나를 선배라고 불렀다) 는 졸업 후에 무역과 관련된 정부 부처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1년간 여러 부서에 이력서를 넣어도 면접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꼭 무역 업무가 하고 싶었던 그 친구는 무역 관련 대학원에 진학했고, 1학년을 채 마치기 전에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 있는 무역 관련 정부 부처에 특채가 되었다. 축하를 받는 자리에서 그 친구는 자신의 로스쿨 학점이나 기타 경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그 부서와 자주 함께 일하는 교수 추천서가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캐나다에서 자란 본인도 교수의 추천서 한 장이 그렇게 효력이 클 줄은 몰랐다고도 했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을 뽑을 때에도 공채를 하지 않는 다는 건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공채를 진행하는 경우에도 은밀하게 연줄이 동원되는 것을 목격했다. 나와 같은 로펌에서 일하던 변호사 한 명은 로펌 일이 너무 많아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며 캐나다 특허청으로 이직을 했는데, 이 자리는 공채를 해야 하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그런데 채용 담당자가 내 동료 변호사에게 채용 공고문 초안을 써 오라고 하면서 (이게 말이 되는가 - 지원자에게 채용 공고문을 쓰게 하다니) “공채를 해도 너 말고는 해당되는 사람이 없도록 작성해서 초안을 다오”고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친구가 특허청에 채용되었다.
나중에 내가 독립하여 사무실을 차린 후 내 로펌에서 연수생 생활을 한 학생 한 명은 연수 후 일 할 곳을 찾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무실에서 계속 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학부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정부 부처 사람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마침 본인이 한 부서를 맡게 되었고, 부서 확장을 하고 있다면서 바로 그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캐나다에서도 공무원, 특히 연방 정부 공무원은 많은 캐나다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나름 꿈의 직장인데, 그런 자리를 전화 한 통으로 얻은 것이다.
외국에 나가 사는 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이든 프랑스든 영국이든 호주든, 대부분의 서양 사회에서는 연줄이 생활화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연수나 해외 취업 등 일자리가 이미 정해진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외국에 나오는 모든 분들에게 일단 학교를 다니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진 학연을 바탕으로 시작하면 늦게 시작은 하겠지만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수나 해외 취업으로 오는 경우에도 MBA 과정을 마치거나 회계사 과정을 거치는 등 학교와 학원을 다니는 건 좋은 선택이다. 한국으로 돌아가 승진을 하든, 이직을 하든,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캐나다에 남든, 어떤 경우에도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로스쿨 시절 맺은 인연이 졸업한 지 10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하루하루의 내 변호사 생활과 사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참,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