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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Apr 11. 2023

남의 발을 밟아도 미안해하지 말자

좋은 사회의 기준을 생각하다

한국에서 일하던 시절, 나는 보통 7시까지는 출근을 했기 때문에 아침에 "지옥철"을 경험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날의 술자리로 늦잠을 자는 날은 지옥철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 키가 큰 편이라 그나마 위쪽의 다소 신선한 공기를 소비할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키가 작았다면 다른사람들이 생산하는 이산화탄소를 감당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움직일라치면 다른 사람의 발을 밟는 건 예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나는 예의바른 한국인이니 바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상대방도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눈치였다. 가끔은 눈을 흘기면서 째려보는 분도 계셨지만.


나만 남의 발을 밟는 건 아니었다. 내 발을 밟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상대방도 예의바른 한국인이니 당연히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고 나도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내 발을 밟고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분들도 계셨다. 


사과를 듣던 말던 내 발 밟힌 건 바뀌지 않으니, 뭐 꼭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뭔가 찝찝했다. 아니, 남의 발을 밟았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옆 모습을 잠시 째려봐 주곤 했다.  


그런데, 우연히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내 발을 밟고 사과하지 않는 어떤 "인간"의 발을 조금 후에 내가 밟게 되었다. 아니, 왜 하필이면 내 발을 밟고 내 옆에 서 있느냐는 말이다.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사과가 나오려는 것을 내 의지로 막고 사과하지 않았다. 그 "인간"도 사과를 안 했으니 말이다.


째려볼테면 째려 보라지. 그럼 나도 맞 째려보기를 시전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인간"은 내가 발을 밟고 사과를 안 하는데도 신경쓰지 않았다. 내게  사과를 받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혼잡한 지하철에서 머릿 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남의 발을 밟고 사과를 하니, 나도 내 발을 밟은 사람에게 당연하게 사과를 기대하는 것이로구나. 남이 나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한 거로구나.


그러니, 내가 예의바를수록 남은 내게 예의없는 "인간"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나는 내 기준에 맞춘 남의 예의바름을 기대하는 거다. 내가 남의 발을 밟고 사과를 하니 내 발을 밟은 그 "인간" 의 사과를 기대한 것이고, 그 "인간"은 자신이 남의 발을 밟아도 사과하지 않으니, 자기 발을 밟은 내게 사과를 기대하지 않는 거다. 그 "인간"은 나보다 예의는 바르지 못할지언정 남의 예의 없음에 대한 포용성은 나보다 더 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말이 좀 안 되는 것 같지만, 어찌보면 서로 사과하지 않는 문화나 사회가 더 포용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발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새 신발 망가진 것도 아닌데, 발 한 번 밟힌 것 쯤, 그러려니 하고 서로서로 넘어간다면,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예의가 없는 사회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동 지방에 선교를 가셨던 한 선교사 분이 체험하셨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러 갔는데, 손님 중 한 명이 그만 접시를 깨뜨렸단다. 그런데 접시를 깬 손님이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아, 별 거 아니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니, 그건 집 주인이 하면 몰라도, 접시를 깬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도 별 일 아니라고 말하는 문화가 너무 예의없어 보이더란다. 


그런데, 지내다보니 점점 편해지셨다고. 선교사님께서도 남에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본의아니게 많아서 (살다보니 서로 피해를 주는 일을 피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너무 미안해 했지만 나중에는 "괜찮아, 별 거 아니야"로 때울 수 있음에 마음이 편해지시더란다. 피해주는 일을 피할 수 없다보니 서로간의 포용성을 키우는 쪽으로 문화가 발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맞춰 남의 행동을 기대하기 마련이니까. 사소한 일에 사과를 하지도, 받지도 않는 사회는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포용성이 큰 사회인지도 모른다. 포용성이 큰 사회가 나쁜 사회는 아니지 않나. 예의를 지킨다는 이유로 나쁜 사회를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니, 지하철에 써 붙이자.


"남의 발을 밟고도 사과하지 말고, 발을 밟혀도 사과를 기대하지 맙시다"


오해 마시라 - 모든 비매너를 용서하고 포용하자는 건 아니니.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하철에서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발을 막 밟고 다니면 어떻게 하느냐고? 혹시라도 "나는 사과 안하지만 너는 해라"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에이, 그건 그저 나쁜 놈이니, 상종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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