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져라! 기회가 된다면

자만했던 우물 안 개구리의 고백

by 신광훈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좋은 점 중 하나는 직원에 대한 교육이 꾸준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문화가 다른 세계 여러나라에서 사업을 하면서 모든 직원들이 같은 비젼과 방식을 공유해야 하니 더욱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독일계 다국적 기업에서 Portfolio Manager로 일하던 시기에 아시아 국가의 중간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내 리더쉽 교육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각 나라에서 1-2명이 참가를 했는데, 동남아시아나 중국, 일본은 물론 동유럽권에서도 참가했으니, 주최국인 독일까지 꽤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리더쉽 교육을 위해, 그리고 향후 상위의 관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프르에 모였다.


교육은 여러가지 모듈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시간은 참가자들을 서로 다른 나라의 참가자들과 함게 4-5명씩 그룹을 지어 주어진 문제나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문제와 상황에 대해 크게 4-5가지의 해결 방향을 주고, 그 중 가장 적합한 한 방향을 선택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그룹별로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첫 번째 문제를 보자마자 나는 1번 유형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니, 이런 걸 문제라고 내다니. 신입 사원 교육도 아니고 중간 관리자를 모아놓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런데, 놀랍게도 나와 같은 그룹에 속한 사람 중 아무도 1번이 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2번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4번이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1번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적어도 1번은 답이 아니라는 데에 오히려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놀라움이었다. 세상에, 이 나라에서는 이런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중간 관리자라고 일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아무리 일을 못하고, 리더쉽 공부를 안 한다고 해도 한국과 너무 수준이 차이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굳이 논쟁할 생각도 없었고, 논쟁할 영어 실력도 되지 않았으며, 1번이 아닌 다른 방안은 말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중에 다른 팀 발표를 들으면 해결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토론을 관전만 했다.


드디어 발표시간이 되었다. 첫 번째 팀, 두 번째 팀… 계속 발표를 하는데, 다른 어떤 팀도 1번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나의 두 번째 놀라움이 터졌고, 이런 직원들을 뽑아 중간 관리자를 시킬 수 밖에 없는 다른 나라 지사의 미래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교육 담당자가 곧 다른 사람들의 무지를 개화시켜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감추고 발표를 지켜보았다.


발표와 토론에 이어진 종합 정리 시간에 강사는 각 유형은 단지 서로 다른 리더쉽 유형일 뿐이며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니, 1번이 아닌 것도 답이 될 수 있다고? 하며 내가 세 번째로 놀라는 사이, 강사는 덧붙였다 -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인 조직 (in an internatioal setting)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가능한 한 1번 유형의 해법은 피해라. 뭐라고? 나는 네 번째로 놀랐다.


그러니까, 강사 말이 맞다면, 나는 혼자 가장 피해야 할 답을 붙들고서는 잘 하고 있는 다른 나라 동료들을 비웃고 있었던 거다. 내 생각을 말하지 않기를 참 잘 한 거였다. 다행히도 나는 배움을 즐기는 성격이라,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고 그저 내가 잘 못 알고 있었구나, 더 공부해야 하겠구나, 내가 자만했구나 하고 넘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큰 놀라움은 그 다음에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고, 저녁 후에 교육생들은 삼삼오오 찢어져서 술을 한 잔씩 했다. 국가 차원에서 보았을 떄 대한민국은 일본과 그닥 우호적인 사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2019년 일련의 사태 후에는 더욱 그런 면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경험상 여러 나라 사람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는 이상하게도 보통 한국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일본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날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게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울리는 이유가 전 세계에서 영어가 불편하기로 1, 2위를 다투는 나라 사람들이라 서로 위안이 되어서 그런가보다… 정도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국에서 온 교육생 2명과 일본에서 온 교육생 2명, 총 4명이 모여 식사 겸 맥주를 한 잔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날 받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다른 3 사람 역시 첫 번째 상황에서는 1번 유형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매우 놀랐고, 그제서야 왜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모이는지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은 유럽이나 미대륙은 물론이겠고, 같은 아시아권 국가의 사람들하고도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 적어도 조직 안에서는, 적어도 리더쉽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그 날의 경험은 별 생각 없었던 내 진로에 대해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 회사 생활의 장기 목표는 (목표일 뿐이었지만) 그 다국적 회사에서 아시아 권의 regional head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내 업무 뿐만 아니라 연구, 생산, 유통, 영업, 외국어 등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나는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리더가 될 수 있을까? 내 리더쉽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나 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이나 일본을 벗어나면 내 리더쉽이 통할까? 아니, 내 업무 방식 자체가 인정받기는할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머지 교육들도 좋았고, 배운 것은 많았으나, 이 고민은 교육 기간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오래, 깊이 할 수는 없었다. 교육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니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회사에도 집에도 할 일은 넘쳐났으니까. 하지만, 이 시기의 경험으로 몇 년이 지난 후 정말 우연히 해외로 나가 볼 기회가 생겼을 때 크게 망설이지 않고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인은 한국인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적인 사고라는 틀이 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이지만). 하지만 한국과 일본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있다는 내 추측이 맞다면, 우리는 한국과 일본을 벗어나서는 인정받는 역량을 갖추기도, 인정받는 리더쉽을 갖추기도 어려울 것이고, 리더의 자리에 도달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와의 교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니, 기회가 되면 다른 나라에 나가보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다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다른 것에 양보하지 말라고 말한다.


무서워말고 나가라! 그리고 부서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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