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만한 일을 할 때까지

대한민국 영어교육, 훌륭하네!

by 신광훈

믿을만한 일을 할 때까지


드디어 지적재산권 분야에서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다는 로펌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회사의 지분을 가진, 그러니가 회사의 주인인 변호사들은 Partner 라고 하고, 회사의 지분은 가지고 있지 않은 고용 변호사들을 Associate Lawyer라고 하는데, associate lawyer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내가 로스쿨 학생이던 시절에 두 여름동안 주로 함께 일했고, 나를 좋은 평가를 해 주어 변호사로 채용이 될 수있게 해 준 변호사들은 대부분 상표법 쪽 변호사였는데, 식물병리라는 내 전공 때문인지 특허법 부서의 생물/화학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꿈만 같았다. 요원하게 보였던 창문이 있는 내 사무실을 갖게 되었고, 비서도 생겼다.


가슴 벅차게 출근을 하고, 이미 지난 2년간 여름마다 일을 했으니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사무실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내 이름표가 붙어있는 내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그런데, 할 일이 없다.


파트너 변호사들이 오히려 내가 로스쿨 2학년일 때보다도 일을 주지 않았다. 변호사에게 legal research일을 줄 수는 없고 고객에게 비용을 청구할 수 있는 일을 주어야 하는데 초짜 변호사에게 줄 만한 일이 없는거다. 그래도 이제는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으니 조바심은 나지 않았고, 오히려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


그래도 영어는 계속 족쇄였다. 이제 듣기와 말하기는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리고 읽기와 쓰기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읽고 쓰는 속도는 여전히 원어민과 차이가 나다보니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작성한 서류에는 항상 수정이 많이 되어 돌아왔는데, 사실 영어가 틀렸다기 보다는 선호하는 표현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굳이 그런 것으로 따질 위치는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일도 배워나가고 아주 조금씩이지만 파일도 늘려 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생물/화학 특허 부서의 수장이 나를 불렀다. 특허명세서 두 개를 주면서 비교하고 차이점을 정리해 달라고 한다. 하나는 우리 고객 것이었고, 하나는 다른 회사의 특허였다.


사무실에 가지고 와서 찬찬히 읽어 보았는데, 우리 고객의 특허 명세서에 있는 유전자 지도가 명세서와 잘 맞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다시 그려보고, 명세서 내용과 맞춰보기를 꼬박 이틀을 했는데도, 뭔가 빠진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이 유전자 지도에 대해 내가 추정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이러이러한 정보를 고객이 가지고 있는지 등 궁금한 사항을 정리해서 파트너 변호사에게 전달했고, 파트너 변호사는 그 내용을 고객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그런데, 그 날 오후 파트너 변호사에게서 긴급 호출이 왔다. 아래 층에 있는 회의실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보통 그 회의실은 변호사를 해고할 때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나는 순간 긴장했다. 반년도 못 버티고 잘리는건가.. 차라리 한국에 돌아갈 걸 그랬나.. 내일 뭐부터 알아봐야 하지..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회의실로 갔는데, 내가 작성해 보낸 내용으로 고객이 매우 화가 나서 전화를 달라고 했다고 하며 스피커폰으로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너무 멍청한 질문을 한 것인가, 너무 뻔한 것을 이해 못한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실력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건가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가운데 고객이 전화를 받았다. 파트너가 스피커폰이라는 걸 안내하고,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한 후에 “그런 이메일을 보내 죄송하다”라는 사과로 대화를 시작해서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변호사들은 웬만하면 미안하다고 하지 않기 때문인데, 한국도 그렇지만, 그 말 자체가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트너가 사과를 하다니 – 회의를 마치고 해고로구나 싶었다.


그 뒤로 약 3분 정도 고객이 고함을 치면서 얘기를 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그런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서 기록을 남기면 어떻게 하는냐. 전화로 물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고객은 꼭 숨기고 싶은 내용이 있었고 (원래 특허 명세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충분히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용에 대한 추측과 질의가 이메일에 있었던 것이다. 침착하게 거듭 사과를 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파트너 변호사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You did a great job”.


그 다음부터 내게로 오는 파일의 양이 급격하게 늘었다. 반 이상이 부서의 수장에게서 오는 것이었지만, 다른 파트너들이 주는 파일량도 증가했다.


예전에 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동서양의 신뢰 관계 차이에 대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양에서는 믿지 못할 일을 할 때까지 믿지만, 서양에서는 믿을 만한 일을 할 때까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전화 사건으로 내게 파일을 맡겨도 된다는 신뢰가 생긴 듯 했는데, 겪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직원을 채용할 때에도 공채보다는 추천을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공채는 어쨌든 믿지 못할 사람을 뽑는 것이고, 추천은 남이 믿는 사람을 뽑는 것이니.


대한민국 영어 교육, 훌륭하네!


그리고 몇 주 뒤, 전사적으로 영어 교육에 대한 공지가 내려왔다. 온타리오에서 변호사 자격을 유지하려면 매년 일정 시간 이상의 일반 교육과 전문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마침 온타리오 변호사 협회에서 주관하는 “변호사를 위한 글쓰기” 교육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로펌에서는 전체 변호사가 의무적으로 받는 것으로 결정이 되어서 지사별로 많은 변호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 첫 부분에 강사가 교재로 배포된 자료에 있는 첫 두 페이지 문제를 3분간 풀어 보고 각자의 실력을 테스트 해 보라고 한다. 딱 보니, 한국의 고등학교 문법 문제다. 성문기본영어에 나오는 문제들이다. 한국의 영어학원이라면 가르치지도 않을 것들인데, 뭘 이런 걸 테스트라고.


거의 기계적으로 첫 번째 장에 답을 쓰고 페이지를 넘기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얼굴을 들어보니 몇몇 변호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래서 옆 사람을 보니 첫 페이지 반도 못 풀고 있어서 이번에는 내가 놀랐다. 그리고 두 번째 장까지 풀고 주위를 보니, 대부분 첫 페이지에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국 영어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라던 문법위주의 교육이 이렇게 효과가 있을 줄이야. 대부분의 동료 변호사들은 주어진 3분 안에 문제를 다 풀지 못했다.


답을 맞춰 보는데, 나는 틀린 것이 없었다. 사실 틀릴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국 고등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했다면 틀리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교육이 끝난 후, 우리 부서 수장 변호사가 나를 보며 한 마디를 했다.


“Impressive!”


내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는 파트너 변호사들이 내 서류에 수정을 다는 정도가 훨씬 줄어든 것 같았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는 느낌이랄까.


주식투자를 전업으로 하는 어떤 분이 말씀하시기를 신용이란 유무형의 자산을 빌릴 수 있는 평판이라고 했다. 로펌에서 일하는 associate lawyer에게 있어서 신용이란 파트너 변호사가 일거리를 주는 정도로 평가된다. 파트너들의 가장 큰 책임 중 하나가 로펌의 고객을 관리하는 것이고, 일이 잘 되지 않으면 파트너 입장에서는 고객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니 일을 맡길 때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일하던 로펌에서 고객이라고하면 대부분 Fortune 500 기업 중 하나였으니 잘 못되는 경우에는 파트너 개인은 물론 로펌으로서도 피해가 큰 일이기 때문이다.


뜻밖에 주어진 두 번의 기회로 얻은 두 평가 - You did a great job과 Impressive. 그 것으로 나는 간신히 함께 입사한 동료 변호사들과 비슷한 정도의 신용을 획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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