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가 된 승진 탈락
나를 식물병리학 전공에서 법학 전공으로 바꾼 그 날은 부서장 승진에서 탈락한 날이었다.
저녁은 술이었다. 물론 업무다. 업무상 어떤 해에는 일년에 6개월 이상 출장을 다니고, 출장이 아닌 날도 술자리 없는 날은 드물었다. 내가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았기도 했지만, 마다한다고 빠질 수 있는 자리는 얼마 되지 않기도 했다. 그 날도 그렇게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늦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꽤 늦은 시간이었으나 여전히 사람은 많아서 서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회사다. 회사에서 이 시간에 누가? 생각하며 전화를 받아보니 인사팀이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부서장 승진에서 탈락했단다. 내일 아침에 발표가 될 거란다.
아, 떨어졌구나.
생각해 보니, 첫 회사에서 주임을 달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때에 맞춰 승진한 적이 없었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을 항상 정해진 시기보다 1년씩 늦게 달았다. 한 번은 회사를 옮기면서 조기 승진을 약속받기도 했으나, 그 때에도 실제 승진은 약속된 시기보다 1년 늦게 이루어졌다. 내가 몸 담은 회사 3군데 모두 차장까지는 연수만 채우면 승진하는 회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지간히도 승진과는 인연이 없었다.
겪어본 사람만 안다. 어떤 이유로든 능력과 관계없이 연수만 채우면 누리는 승진에서 탈락되는 것은 힘이 빠지는 일이다.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끈 웹툰 미생에도 나오지 않는가 – 직장을 다니는 재미 중의 하나는 때 맞춘 승진이다. 이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열심히 일을 할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사라진다.
승진에서 누락될 때마다 항상 듣는 말은 그거였다 – 하는 일이 이미 더 높은 직급의 것이니, 실제 승진은 늦게 가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인가. 내가 괜찮지 않은데.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승진과는 좀 다른 거였다. 차례를 기다려서, 연수를 채워서 하는 승진이 아니라 나름 경쟁으로 한 명을 뽑는 부서장 승진, 임원 승진이었다. 뭐, 다른 직급 승진처럼 연수가 차면 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 승진은 어차피 여러 명의 지원자 중에서 한 명만 되는 거니까. 어제까지 동료였던 다른 사람이 이제 상사가 되겠지만, 그건 내가 승진했어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대리나 과장 진급에서 누락되었을 때에 비하면 마음은 담담했다.
그 날까지 나는 스스로 길을 개척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한 길이 끝날 때 즈음에는 다른 길이 저절로 나타났고, 그럼 생각없이 새 길로 올라타고 열심히 달렸다. 막다른 길에 서 본 적은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군따라 중학교를 갔고, 그렇게 다시 학군에 맞추어 고등학교를 간 후, 적성보다는 학력고사 (지금의 수능) 성적에 맞추어 대학을 갔다. 대학교 4학년 때 입사를 권하는 회사가 있어서 입사 시험도 없이 면접 한 번 보고 회사 생활을 시작했고, 회사와 부서간에 갈등이 생겨서 우리 부서 전체가 퇴사하는 일이 있을 때에도 오라는 회사가 있어서 회사를 옮겼다. 평사원, 주임, 대리, 과장, 부장 한 단계씩 승진하면서, 비록 때에 맞추지는 못했지만 차례차례 내 앞에 나타나는 길을 걸었왔더랬다.
그리고 이제 임원을 달 때인데 탈락한 거다.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누우니 몸이 좀 편해져서 그런지 그제서야 탈락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하지만 그저 길이 좀 좁아진 느낌이랄까. 8차선 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다시 2차선으로 좁아졌다가 이제는 외길이 된 느낌이었지만, 길이 막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39살에 처음으로 멈춰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 길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이번에 부서장이 되는 길은 막혔으니, 어쨌든 다른 길을 생각해 보아야 했다. 독일 본사로 연수를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아시아 head office에서 근무하는 방법이 있을까, 그것도아니면 일본이나 중국에서 몇 년 일하고 오게 해 달라고 요청해 볼까, 이런 저런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는데, 내가 생각해도 여의치 않았는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길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길에 벽이 생겼구나.'
누군가는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 했지만, 처음 벽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만나니 어떻게 눕힐지, 어느 방향으로 눕힐지 알 수가 없는 건 당연하고 벽인지 아닌지도 확신이 없었다. 이게 벽이라면 눕혀지기는 하는 벽일까.
난생 처음으로 벽을 만났다는 생각이 주는 느낌은 생소했다. 처음에는 그저 길이 좁아지는구나, 위로 올라갈수록 자리는 없어지니까 당연하지,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다른 길을 생각하다보니 다른 길이 마땅치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걷던 길은 막히고 다른 길은 열리지 않는 상황. 그랬다. 그게 벽이었다. 그렇게 그 길이 막다른 길이 되는 거였다.
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음 승진 기회까지 기다리는 거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하면서. 부서장 승진이 한 번만 있는 기회는 아니지 않은가. 매년 승진은 이루어지고, 언젠가는 또 부서장을 뽑을 테니.
잡다한 생각이 나면서 냄비 안의 개구리 비유가 떠 올랐다.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뜨겁다고 뛰쳐 나오지만, 서서히 온도를 올리면 조금씩 조금씩 견디다가 결국 익어서 죽는다는 이야기 – 다가오는 위기에 둔감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다. 혹시 나는 냄비안의 개구리일까.
그건 아니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 길은 언젠가는 막다른 길이 될 거라는 걸. 마흔이 다 되도록 회사 생활을 해 오면서 그걸 몰랐다면 말이 되지 않는 거다. 그저 앞쪽 길이 당장은 막히지 않았잖아, 아직은 벽이 보이지 않잖아, 그렇게 외면하면서 걸어왔는데, 벽이 바로 앞에 있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지 생각해 보니, 그 때까지는 멈추면 뒤처질까 싶어 계속 달렸다. 주위보다 더 열심히 달려서 평균보다는 조금 앞섰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승진에서는 밀렸어도 업무적으로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디로 가는지 보지 않고, 묻지 않고 달렸다. 그러다보니 서게 된 자리가 그 자리였다.
솔로몬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했다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는 일은 없다. 시간이 지난다고 어떤 일이 나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내 감정이, 내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지나간 일로 생각되는 것일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려면 변화는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해야 한다. 변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것이 되는 진화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요즘 랍스터는 세계 어디에서나 비싼 요리지만, 예전에는 바다의 바퀴벌레라고 불리면서 사람 취급 받지 못하던 죄수나 노예들이나 먹던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랍스터가 대우를 받으려면 두 가지 길 밖에 없을 것이다. 대우를 받게 될 미래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거나, 아니면 그 당시에도 대접받던 해산물인 굴로 변하거나.
그런데, 랍스터가 굴이 될 수 있을까. 냄비 안의 개구리는 물이 천천히 뜨거워져서 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냄비 벽이 너무 높아 보여서 아예 뛰어보기를 포기한 것을 아닐까. 뛰어보면 넘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랍스터가 변해서 굴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피식 웃으면서 든 생각이었했지만, 계속 다짐했다. 진화해야겠다. 나는 내가 랍스터라고 생각하지만, 랍스터로서 제 값을 받지 못한다면 굴이 되어야겠다. 적어도 막다른 길에 서서 벽을 눕혀보겠다고 씨름만하면서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