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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Mar 13. 2023

뿌리에 대한 단상

해외에 나가서 살아보니

아내가 국화를 사와서 화병에 꽂아 놓았다. 붉은 국화다. 흔히 보는 자주색이 아니라 분홍과 빨강의 중간쯤 되는 색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하려고 보니,  화병 안의 물이 붉은 색으로 변해 있다. 처음 보는 일이다. 아마도 꽃 색이 원래 붉은 것이 아니라 색소를 빨아들이게 해서 붉게 한 것인데, 이제는 거꾸로 꽃에서 화병으로 색소가 빠져나오고 있는 듯 했다. 화병에 꽂아 놓았지만 하룻밤 사이에 꽃도 좀 시들었다. 



아마도 이 국화는 원해는 하얀 국화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다시 뱉어 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붉은 색소를 이 꽃은 어떻게 품게 되었을까. 


그건 온전히 뿌리의 힘이다. 잎과 줄기만으로는 소화할 수 없는 분량의 색소를 꾸역꾸역 밀어 넣어 주어, 하얀 국화로 하여금 내 아내를 유혹할 만한 붉은 색을 띄게 한 것은 뿌리의 힘이다. 농도를 거스르는 붉은 색을 하얀 꽃에게 입혀 준 것은 뿌리의 힘이다.


이제 뿌리가 없으니, 흰 국화는 싱싱함도 지킬 수 없고, 자신이 내세웠던 붉은 색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어디까지 희어질 지는 모르지만, 아마 처음의 흰색도 아니고, 가장 붉었던 때의 색도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색도 아니고, 자신이 사랑받던 색도 아닐 것이다. 


해외에 나가 살더라도 뿌리를 자르지 않아야 할 이유다. 


지금 보이는 나를 나답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뿌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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