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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Feb 23. 2023

이름이 없어야 나로 살 수 있다

나의 이름과 나의 존재

국어책에 나오는 것 빼고는 시를 알지 못하는, 시에는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나도 외우고 있는 싯구가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 시는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함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말 이름이 있음으로 인해 존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이름을 가짐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닐까.


수 많은 동물 중에서 이름에 집착하는 건 인간뿐이 아닐까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은 우리 조상들도 이름에 큰 의미를 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양자를 들이는 것도 그렇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전에는 아들이 없는 경우 가까운 친인척의 아이를 양자로 들이거나, 혹은 무예나 학식이 뛰어난 사내 아이를 양자로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하고 가문의 영광을 도모했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가문을 잇는다는 건 나의 존재를 잇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 혹은 가문의 이름을 잇는 것일 뿐이다.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도 나의 존재를 잇기 위함이라면 쉽게 이름만 이을 수 있는 양자보다는 내가 가진 가치를 배울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겠다.  


이름이란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 회계사님, 변호사님, 대장님 이런 직업명도 이름이다. 김주임, 박대리, 최과장, 이부장, 정이사, 조사장, 신회장 이렇게 회사에서 불리는 직책도 이름이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말도 기본적으로는 우리는 호랑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남에게 의미가 있다는 뜻이니, 물론 중요하다.


이름은 나를 남과 구분하는 수단이다. 나 혼자일 때에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있으면 이름으로 구분되어야 다시 그 이름 사이에 관계를 맺기 좋다. 옆 집 아저씨, 뒷 집 처자, 이런 이름이라도 있어야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고 관계를 맺기 좋다. 그리고 사람은 관계의 동물이라 하니, 관계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이름이 있는 것이 중요함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름이 없다고 해서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낀다면 이름의 중요성이 과장된 것이다. 관계가 없어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름을 소중히 하는 것은, 이름을 얻으면 그리고 이름을 얻어야만, 내 존재의 가치가 생긴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가진 것들로 가치가 있다. 제일 화려하든 덜 화려하든 공작의 꼬리는 다른 어떤 새 보다 아름답고, 제일 우람하든 조금 덜 우람하든 고릴라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듬직한 덩치가 있다 (음... 킹콩도 고릴라로 치자).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부르든 내가 가진 꼬리와 덩치가 나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 나를 덜 나답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에 집착하는 것은 남이 보는 나를 내가 보는 나 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결과를 낳는다. 누구 엄마, 누구 남편으로 불리는 것이 지겨워 일탈을 행하다가 가정이 망가졌다는 기사는 이제 새롭지도 않다. 다른 이가 있어야 존재하는 내 이름은 내가 나 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방증이다. 


어쩌면, 이름을 없어야 내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아야 홀로 서 있는 나의 가치를 알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잊어야, 비로소 나로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를 빌어서 말해 본다면, 관계는 둘이 만나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선 둘이 만날 때 비로소 제대로 세워지는 것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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