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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도, 해 낼 수 있다

좋은 학점은 공부보다는 요령이었다

by 신광훈

1학년 여름 방학 동안 summer student를 마치고 나서도 학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학점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지만, 혹시라도 학점을 보여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내 1학년 학점으로는 어떠 로펌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수업 자체는 따라갈 만 했다. 문제는 시험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읽고 분석하고 생각한 답안을 다 써야 점수가 나올텐데 1학년 때는 문제를 읽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분석도 일부 밖에 하지 못했고 논리적으로 답을 쓸 시간도 부족했다. 게다가 그 고질적인 나의 이과적 사고 - 피고든 원고든, 고소인이든 피고소인이든, 한 쪽만 옳고 한 가지 답밖에는 없다고 말하는 사고 - 로는 좋은 학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1학년 내내 뼈저리게 느꼈다.


기말고사로 대부분의 학점이 결정되는 로스쿨 시스템상 기말고사를 극복하지 못하면 좋은 학점은 받을 수 없고, 좋은 학점이 없으면 미래가 너무 불안했다. 그래서 2학년 1학기에는 더 독하게 학점에 올인하기로 했다.


한인학생회 선배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공부하는 것 보다도 답안 쓰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단다. 나는 이 자문에 좀 회의적이었다. 한국에서 의대를 간 친구가 있었는데, 1학년 1학기 첫 번 시험 준비를 하면서 공부보다도 쓰기 연습을 더 많이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험 시간에 써야 할 것을 다 쓸 수 없다고 과 선배들이 조언했다는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났던 기억이 있어서다. 아니, 써야 할 것을 늘리기 위해 공부를 해야지, 답안 쓰는 연습이 무슨 시험 준비가 되겠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2학년 과목은 일단 과거 시험문제를 많이 구할 수 있는 교수님들 과목들을 고르기로 했다. 그래야 답안 쓰는 연습을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 2학년 1학기에는 세법이 있었다. 한인학생회 선배들 말로는 한국인은 숫자에 강해서 그런지 모든 로스쿨 학생이 어렵다고 하는 세법에서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했다.


영어는 그 때까지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에 그저 계속 공부해야 했다. 동기 캐나다인들을 영어 선생님으로 고용해서 회화를 배우고, 잘 썼다고 평가되는 판결문이나 논문을 몇 개 골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고, 읽고 또 읽었다.


학점에 가산점을 준다는 부분이 있으면 리포트든 발표든 무조건 한다고 했다. 발표를 해야 하는 경우 자료를 조사하고, PPT를 만들고 원고를 준비해서 ESL 1:1 수업을 했다. “영어는 변호사의 무기”라고 당당히 말하는 로스쿨에는 당연히 영어 교육 서비스는 없었다. 하지만, 로스쿨이 있는 대학 차원에서 유학생에게 지원되는 ESL 프로그램이 있었다. 갓 유학온 학생들이 듣는 ESL 코스를 로스쿨 학생이 듣겠다고 하니 ESL 사무실에서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래서 어쨌든 나도 등록금 내는 학생이고 모든 학생에게 열려있는 프로그램이니 배울 기회는 달라고 거듭 요청하고, 일반 ESL 프로그램이 아니라 1:1 free takling class를 1주에 한 번씩 (보통은 매일이지만), 그렇게 3달 동안만 허용해 달라고 사정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매주 갈 때마다 내가 준비한 내용을 교수 앞에서 발표하고 자문을 부탁했다. 흔한 1:1 영어회화 수업을 생각하고 있던 교수도 재미있어 했고, 그렇게 발표를 준비했다.


수업 시간 중의 토론으로는 아무래도 내가 좋은 점수를 받기가 어려웠다. 내가 발표할 문장을 머리 속에서 영어로 완성하는 동안 이미 그 주제는 지나가 있었다. 발표는 해야겠는데, 토론에 끼기는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다른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짧지만 교수가 좋아할 만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준비해서 질 좋은 질문들을 할 수 있다면, 질문만 해도 교수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시험 준비 기간의 대부분은 조언 받은대로 기출 문제를 푸는데 할애했다. 문제를 풀고, 풀고, 같은 문제를 쓰고, 쓰고 또 썼다. 쓰다보니 내 생각과 달이 도움이 되었다. 교수가 의도한 양 쪽 입장을 다 파악하려면 일단 생각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하고, 그럼 시간이 없으니 문장을 생각하지 않고 정신없이 써야 하는데 그럼 또 영어가 망가진다. 양쪽 입장을 다 고려하면서 영어도 나쁘지 않게 하려니 많이 써 보는 수 밖에는 없다는 걸 알았다.


영타 연습도 계속했다. 오타가 한 번 나면 고치는 시간이 더 많이 든다. 타이핑하고, 타이핑하고 또 타이핑했다.


그렇게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치렀다.


드디어 성적이 나오는 날, 전산으로 확인해야 하는 성적표라 떨리는 마음으로 클릭. 나도 모르게 눈이 저절로 감겨졌다 - 다음 학기에라도 이번 학기보다 더 준비할 자신은 없는데, 더 쏟아부을 것도 없는데, 이번에도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용기를 내어 눈을 떠 보니 A 세 개와 B+ 한 개. 이 정도면 어느 로펌에 내 놓아도 성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거였다.


만세였다. 도서관만 아니라면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기뻤고 지난 1년간 주저앉았던 자신감이 소폭 상승했다. 마음 편하게 2학기를 맞을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1학년 1학기부터 상담을 해 오던 교수님께도 말씀을 드렸다. 그 분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ESL 수업을 다녀야 하는 학생이 받은 학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라고 하셔서 더 기분이 좋았다.


당연히 집에 자랑을 하고 그 날 저녁은 아내가 준비한 고기 파티. 그런데, 열심히 자랑질을 하는 중에 딸이 불평을 한다. 예전에는 오빠가 잘 못한 것을 아빠한테 이르면 아빠가 정확하게 판단하고 정리해 주었는데 (예를 들면, 오빠가 잘 못했으니 사과해, 이 건 동생이 참고 넘어가야 해 등등) 이제는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면 오빠 말이 맞고 저렇게 생각하면 네 말이 맞네” 라고 얘기하면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혹시 내가 성적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시험 준비를 잘 해서가 아니라 내 사고 방식이 바뀌어서인 걸까.


어쨌든 요령을 터득하니 더 이상 학점이 두렵지 않았다. 2학년 2학기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았고 3학년, 로스쿨 최고 학번이 되었다. 그런데, 한인학생회 2학년생 하나가 고민이 있다고 한다.


본인은 University of Toronto에서 제일 잘 나가는 St. George Campus에서도 가장 유명한 정외과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너무 자랑스러웠단다 (참고로 이 대학, 이 학과를 나온 학생들의 자부심은 서울대 법대나 의대에 합격한 고 3의 자부심에 버금간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너 내 성적표 한 번 볼래”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로스쿨 1학기에 성적의 대부분을 C와 D를 받고, 충격을 받아 2학기에는 정말 마음먹고 노력을 했는데 2학기에도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다고 했다. 이미 자존심은 무너진 지 오래인데, 누구한테 말하기는 싫고, 로스쿨을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나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mentor는 따로 있었는데, 왜 나에게 이야기를 한 것일까. 짐작컨데, 영어도 어눌한 1세가 어떻게 3학년까지 버텼을까,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내가 겪은 일과 내가 한 방법들을 시시콜콜 다 알려주었다 (내 1학년 학점을 아는 건 아내 말고는 아직도 이 녀석뿐이다). 그리고, 학점은 1.0만 넘으면 졸업은 하는 것이니 (그렇다. D 만 받아도 졸업은 한다. 연수 자리를 구하고, 로펌에 취직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절대로 포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


1년 뒤 졸업식을 하는데, 이 친구가 보온 물병 선물을 가지고 졸업식에 찾아왔다. 내가 했던 대로 했고, 내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2학년 성적은 본인 학부 성적만큼이나 잘 나왔다고 했다. “You are my mentor” 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하는데, 손이 아플 정도도 꽉 쥐어서 뿌듯했다.


로스쿨 성적은 똑똑한 사람이 잘 받는 것이 아니라, 요령있게 시험 준비를 한 사람이 잘 받는 것이었다.


사고 방식도 변호사처럼 변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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