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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로스쿨에도 연줄이 있다

캐나다 연줄 이야기 (3)

by 신광훈

다른 글에서 이야기 한 캐나다에는 연줄 사례는 로스쿨에도 있었다.


내가 일하던 로펌은 캐나다 지적재산권법의 성지인 오타와에 있었고, 오타와에는 연방 대법원도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법원에서 은퇴한 대법관 분들은 대형 로펌에 새로운 둥지를 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느 날 동기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데, 대법원에서 은퇴하고 같은 건물의 다른 로펌에 자리를 튼 대법관이 동료들과 식사를 하러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로펌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알고 있었고, 같은 건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매일 판결문만 읽던 대법원 판사를 직접 본다는 것은 흔히 있는 경험은 아니었으니 다들 흥분했다. 야, 저 사람이 그 사람 아니야? 어 맞네, 저 분이 그 분이네, 하며 난리가 났다.


그런데, 동기 한 명이 “그게 누군데?”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측면에서 난리가 났다. “너, 저 사람 몰라? XXX 사건, YYY 사건, ZZZ 사건 판결문을 쓴 판사잖아!” “로스쿨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저 사람 판결문 읽었을 텐데!”. 그런데, 그 판사를 몰라보는 동기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 로스쿨 다니면서 판결문 한 번도 안 읽어봤어. 유태인 로스쿨 학생회에 있는 족보만 봤어”.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로스쿨에 있는 대부분의 클럽 (일반 대학교나 마찬가지로 운동클럽, 봉사 클럽, 음악 클럽 등 다양한 클럽이 있다) 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거 수업에 대한 족보를 가지고 있다. 선배들이 모아 놓는 것이다. 하지만, 로스쿨 교수들이 계속 바뀌고, 각 교수가 가르치는 과목도 작년과 올해가 다른 경우가 많아 내가 필요한 족보를 다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Osgoode Hall Law School 내에서도 유태인 클럽이 가장 많은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는 했다. 한인학생회도 족보를 잘 갖추어 놓은 편이라 한인이 아닌 학생들도 족보를 노리고 가입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유태인으로, 유태인 로스쿨 클럽에 가입해서, 유태인 로스쿨 클럽이 제공하는 족보로 공부했다는 건 그 자체로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성문법이 기준인 한국과는 달리 불문법이 기준인 캐나다에서는 매 판례가 법이 되고, 그래서 중요한 판결문들을 제대로 읽고 그 논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다. 그런데, 판결문을 한 번도 안 앍고 로스쿨을 졸업할 수 있고, 판결문을 한 번도 안 읽고 로펌에 취직이 되는 학점을 받을 수가 있다니. 도대체 어떤 자료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친구는 태생이라는 연줄의 도움을 쎄게 받은 것이었다.


어쩌면 회사 입사에도 연줄이 관여된 건 아닐까 아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만일 좋은 성적이 아니어도 취직엔 큰 걱정이 없는 연줄이 있다면 굳이 판결문을 읽을 필요는 없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판결문을 읽느라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1학년 시절이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연줄에 기대는 것도 한계는 있다. 판례를 읽지 않았던 그 동기는 지금 변호사 자격은 땄으나, 변호사로 일하지는 못하고 Goodlife라는 fitness center에서 운동 강사를 하고 있으니, 연줄만 가지고는 가려던 곳에 가지 못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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