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의 호구는 나일지도 모른다
나이 40이 될 때까지, 직장 생활을 15년 넘게하는 동안, 나는 줄곧 회사가 곧 나이고 회사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인 문화에서 근무했다. 나름 직급대비 회사에 기여한 바가 많다고 생각했고, 회사가 지속적으로 나의 기여를 평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직장 생활 전반부에는 그런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5년차가 넘어 10년차에 접어들 즈음에는, 적어도 종사하던 업계 내에서는, 명함이 없어도 회사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나를 소개할 수 있는 위치는 되어 있었다. 같은 업계에서 10년 이상 직장생활을 했다면 아마도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고용한 회사에서 내 수고에 화답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몸담은 독일계 회사는 개인의 성과에 따라 주던 승진이나 임금 인상라는 보상을 직원간 경쟁 구도로 전환시켰다. 한국 지사의 전체 연봉 인상분을 고정시킨 후, 이 부서 연봉이 많이 올라가면 저 부서 연봉 인상 폭이 줄고, 같은 부서에서는 동료의 인상분을 빼앗아 와야 내 월급이 더 인상될 수 있게 한 것이다.
자괴감이 들지 않은 동료는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직급끼리 점심시간에, 혹은 휴게실에서 모이기만 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다 - 지금 다른 것을 시작해야 할까. 늦었을까. 산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 봉우리까지는 왔는데, 올라가는 김에 조금 더 올라가 볼까. 아, 그런데 옆 산은 더 높아 보이기는 하는데 산을 옮겨 타는 게 정답인가.
하지만, 늘 결론은 내 상황상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하기는 힘들다, 이미 이룬 것을 포기하기는 힘들다, 몇 년 혹은 십 년 더 하고 아이들 대학이라도 들어가면 딴 길을 생각해보자 이런 거였고, 그렇게 술자리로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면 결국 충분한 대우를 해 주지 않는 회사 탓, 이미 들어버린 나이 탓을 하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허영만 화백의 “타짜”라는 만화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져서 히트작이 되었다. 타짜는 운에만 기대는 도박의 룰을 바꾸어, 패를 만들어서, 혹은 판을 만들어서 판을 지배하고 판돈을 딴다. 자기 패를 자기가 만들어 내려고 하고, 남의 마음을 자신이 읽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 주위를 둘러보아도 누가 호구인지 모르겠으면, 바로 네가 호구다.
호구가 누구인가. 실력도 없으면서 도박판에 끼어 없는 실력이나 운에 기대다가 돈을 잃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호구들은 가진 돈을 잃고 나면 고리로 돈을 빌린다. 돈이 더 많으면 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도 결국 타짜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돈을 빌려줄 때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 조금 모자란 듯이 빌려주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호구는 실력이 모자라서 돈을 잃었다는 생각하지 않고 자금이 모자라서 잃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고리로 돈을 빌린다는 것이다.
호구의 끝은 결국 남 탓이고 돈 탓이다. 밑천이 적어서 잃었다, 네가 처음부터 큰 돈을 빌려주지 않아서 잃었다,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호구들은 "탓짜"다. 탓하는데 능하다. 마치 동료들과 회사 탓, 나이 탓을 하고 있던 내 모습같다.
회사의 임금인상 정책이 변경되었을 때, 동료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회사 탓을 하고, 독일 탓을 하고, 업계 탓을 하던 나는 돌아보면 탓짜였다. 호구였다. 내가 그 동안 쌓은 것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으로 내가 움직여 볼 수 있는 판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내가 호구인 판에서 남 탓만 하고 있었다.
3040 직장인은 대부분 타짜가 될 수 있는 밑천이 있다. 하지만, 탓짜의 버릇을 버리지 않으면 내 밑천을 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한국 대기업 중에 대덕 연구단지에 생명과학 연구소를 두고 있는 기업이 있다. 이 기업에서 어느 해인가 추석 보너스를 주었는데, 자회사에서 만들던 생활용품 세트였다고 한다. 연구원들은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추석 보너스가 이게 뭐야? 보너스라고 생색내면서 자회사 재고 처분을 하겠다는 거야? 그 쪽에서 일하는 동료가 이거 원가는 xx 원이라는데? 별별 소리가 다 나왔다고.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자기가 그 제품을 사겠다고 했단다. 다들 옳다구나 하고 팔았다. 집에 가면 치약 치솔 비누는 쌓여 있던 사람들이 많았으니, 선물세트를 하나 더 가져간들 집에서 환영받을 리 만무고 그럴거라면 5만원, 10만원이라도 현금이 낫다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활용품 세트를 산 그 직원은 연구소 부근의 가게에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거래를 제안했단다 – 무자료 현금거래를. 가게 주인도 기꺼이 오케이. 그래서 그 직원은 두둑한 현금 추석 보너스를 집으로 가지고 갔다고 한다. 여기서 승자는 이 직원과, 무자료로 물건을 싸게 받아 어부지리를 얻은 가게 주인이다.
탓짜의 이익은 항상 타짜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비단 도박판 뿐만이 아니다.
타짜가 될 것이냐, 탓짜가 될 것이냐. 3040 직장인에게는 탓짜의 유혹이 더 많고, 그 열매가 일단은 더 달콤하다. 동료들과 함께 남 탓하는 그 맛은 해 본 사람만 안다. 하지만, 탓짜의 끝은 호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