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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ul 04. 2023

좌빵우물

격을 갖춘다는 것

지난 주에 결혼식과 피로연에 초대를 받았다. 신랑, 신부의 부모님들이 혼주가 되어 하객을 맞는 한국과는 달리 캐나다에서는 신랑, 신부 본인들이 친구들 위주로 결혼식을 진행하고, 그 중 일부만 피로연에 참석한다. 그러니, 40이 넘어 캐나다에 온 나로서는 젊은 사람들 결혼에 초대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고, 피로연에 초대받는 일은 더 적었다. 하지만, 이번 결혼은 신랑과 신부 모두 우리 사무실에서 일을 했던 친구들이라 아내와 함께 초대를 받는 것이었다. 


예쁜 야외 결혼식에 이어진 피로연. 미리 개인적으로 주문한 음식에 맞게 원탁에 테이블 세팅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원탁에 되어 있는 테이블 세팅에서는 어느 컵이 내 물 컵인지, 어느 빵이 내 빵인지 알기 어렵다. 



이럴 때 내가 쓰는 마법의 사자 성어가 있다. 


좌빵우물 - 좌측의 빵이 내 빵이요, 우측의 물이 내 물이라는 뜻이다. 


내가 처음으로 격식을 갖춘 원탁에 앉았던 날, 나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지만 어느 빵이, 어느 물이 내 것인지 몰라, 옆 사람이 자기 것을 집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 좌빵우물이라는 간단한 단어를 알게 되었고, 이후로는 더 이상 원탁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원탁의 격, 혹은 격식을 알게 되니 원탁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좌빵우물을 알면, 좌측에 빵이 놓여 있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빵 접시가 내 접시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래서 격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것이 격을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이유가 된다. 


격식은 허례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격식을 무시하면 내가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된다. 격식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을 지 몰라도, 참여의 기회를 제한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격을 갖출 두 번째 이유다.


모든 격, 혹은 격식은 누군가가 세상을 보는 틀이다. 누군가의 틀이 내 것과 같을 수 없으니, 의미없어 보이는 격식은 생각보다 흔하다. 


내가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아내가 사 준 상의와 하의가 다른 재질로 된 양복을 입고 출근하던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장님과 마주쳤다. 그 때 내 옷을 보시고는 사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양복 살 돈이 없어? 한 벌 사 줘? 


그 후로는 회사를 옮길 때까지 그 옷은 입지 못했다. 그 회사에서는 흰색이 아닌 셔츠도 입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쓸모 없는 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그 자리를 필요로 한다면 내가 그 틀에 맞출 수 밖에는 없다. 회사를 옮길 수 없다면 흰색 셔츠를 입어야 한다.  


하지만, 격식이라는 것이 꼭 원탁 세팅을 어떻게 하고, 넥타이 길이는 어떻게 맞추고, 스파게티는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각자가 세상을 보는 틀'이 격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면, 그 누군가는 그 틀로 나를 볼 테니, 그가 내게 기대하는 것을 통털어 그의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내가 주도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내가 갖추어야 할 격은 만나는 사람에 따라 혹은 자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격은 한미 정상 회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외국인 접대 자리에서 와인에 대한 지식을 뽐내고 승진한 사람도 알고 있고, 중국어는 못하지만 보스와 함께 중국 출장을 가면서 일 주일동안 중국 노래를 발음으로만 익힌 후 거래처와 함께 간 노래방에서 중국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워 영국 연수의 기회를 잡은 사람도 알고 있다. 상대방의 틀, 즉 격에 맞추어 줄 수 있는 것이 곧 능력이다.


지금은 남에게 격을 이야기하면, 다시 말해 나의 틀을 이야기하면, 바로 꼰대가 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꼰대가 그런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 틀을 맞추는 건 대부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원탁에서 먼저 좌측의 물을 집어들었다면 그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좌측의 물을 마시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금 신경써서 우측의 물을 집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격을 갖춘다는 것은 허례만 따지는 딱딱한 꼰대가 되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어느 상황에서든 적용될 수 있는 격을 갖춘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그만큼 유연해진다는 것이고, 내가 그만큼 융통성이 있다는 뜻이고, 내가 그만큼 많은 사고의 틀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30대, 40대가 되면서 직장인은 더 많은 격을 요구받는다. 스트레스 받을 것 없다. 회사를 박차고 나가거나, 아니면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서 마음을 다스릴 일이다 - 좌빵우물, 좌빵우물, 좌빵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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