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광훈 Jul 07. 2023

너는 나를 그저 탄수화물이라 하지만.

과일이 되는 방법은 있는데, 용기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바나나는 주일에 교회를 다녀오면서만 먹을 수 있는 (하지만, 매주 사먹을 수는 없었던) 귀한 수입품 과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곡물과 과일로만 거의 매일의 식탁을 꾸리던 때이니,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에서 바나나 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다지 귀한 과일도, 비싼 과일도 아니게 되었고, 캐나다에서는 더 흔한 과일이 되었다. 여기 저기서 수입한 열대 과일이 풍성해서 바나나는 이제 귀한 과일은 아니다. 


과일 중에서는 귀한 취급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바나나는 껍질만 벗겨 있는 그대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직은 과일 취급을 받는 거다. 그런데, 바나나를 생산하는 나라들에서는 상황이 다르다고 한다. 


한국도 캐나다도 바나나를 생으로 많이 먹고, 샌드위치에도 넣어 먹고, 아이스크림에도 넣어 먹으니 소비량이 꽤 많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바나나 생산량의 85%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소비된다고 한다. 바나나는 기후만 맞으면 1년 내내 자라면서 대략 1,200평에서 90톤이 넘는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아니, 우리가 소비하는 것이 단지 15% 중 일부라면 대체 85%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알고 보니, 그 지역에서는 바나나를 조리해서 먹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삶거나, 찌거나, 볶거나, 굽는 등의 방법으로 마치 한국인이 쌀을 통해 탄수화물을 섭취하는 것처럼 바나나를 탄수화물의 원천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꼭 노랗게 익은 바나나만 먹는 것도 아니다. 시퍼렇게 초록색이라 나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설 익은 바나나도 조리법이 있다. 심지어는 바나나로 맥주로 만든다고 하니, 우리가 쌀로 막걸리를 만드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바나나 생산지에서는 바나나가 과일이 아니다. 어떨 때는 과일이 되고, 어떨 때는 채소가 되고, 어떨 때에는 곡식이 된다. 그저 탄수화물이다. 


다시 말하면 귀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일하는 곳에서 나는 귀하지 않다. 사실 귀할 수 없다. 나 만큼의 어학과, 나 만큼의 컴퓨터 실력과, 나 만큼의 사교성을 지닌 사람은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에 있는 한국인은 아프리카에 있는 바나나같다. 차이가 없고 귀하지 않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평생 같은 목표, 그러니까 좋은 대학과 대기업 취직을 보고 스스로를 단련시켜왔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하다. 


바나나는 생산지를 떠나야 그나마 귀하게 대접받는다. 한국이나 캐나다에 와서야 탄수화물 중 하나가 아니라 과일 취급이라도 받는다. 물론 생산지에서라도 특별한 맛이 있거나 특별히 보관이 쉽거나 하는 특수함이 있는 바나나라면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지금보다 귀한 대접을 받고 싶다면 길은 두 가지다. 자기 계발에 매진해서 특별함을 뽐내거나, 아니면 나와 같은 사람이 흔하지 않은 해외로 가거나. 같은 값으로도 더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기회들이 밖에는 많이 있는데, 오로지 안에서만 경쟁하고자 자기 계발에만 힘을 쏟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해외로 나오고 나서야 내가 과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해외에 나간다고 무조건 과일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조기 유학이랍시고 중, 고등학교 때 캐나다에 와서는 매일 학교를 빼먹고 한국인 친구들과 노래방을 다니는 아이들도 많이 보았다. 오히려 탄수화물로 남느니만 못한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일 취급을 받을 기회가 국내보다는 해외에 더 많다는 건 반박하기 어렵다.


자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의 무모함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디서 과일 취급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도, 아니면 일단 해외로 가는 건 정해 놓고도, 돈은 얼마를 모아 놓아야 할 지, 영어는 얼마나 더 해야 할 지 등 세부사항을 정하지 못해 언제 갈까, 언제 갈까 고민만하는 사람도 많다. 만일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시퍼렇게 초록색인 바나나가 노랗게 변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노랗게 잘 익은 바나나가 까맣게 썩어들어가는 데에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내가 과일 취급을 받는 데에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과일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시간도 그렇게 많이 남은 것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좌빵우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