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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ul 03. 2023

길은, 걸어갈 때에만 길이다

어떤 경험이 도움이 될 지 우리는 미리 알 수 없다.

Osgoode Hall Law School에서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성적표를 받아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명확했다. 


영어. 그 언어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였다. 


말과 글로 먹고 사는 변호사를 양성하는 로스쿨에서, 언어 자체가 한계가 되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논리적인 사고는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어가 되지 않으니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2학기가 되고, 나는 모든 교수님들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살아 남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학점을 올릴 수 있을지. 그런 방법이 있을 턱이 있나... 하고 생각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을 한 것인데, 뜻밖에도 해답이 있었다. 


교수님들은 research paper를 쓰거나, research 발표를 하는 것으로 학점의 20-30%를 대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다만, 그건 내게만 주는 특혜는 아니었다. 교수님들 강의 계획서에도 나와 있는 것인데 (사실 읽어보지 않았다. 내 동기 중에도 교수님의 강의 계획서를 읽어보는 친구들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 방법으로 학점을 올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하시며, 하고 싶으면 해 보라고 하셨다. 


너무 기뻤다. 호랑이 앞에서 동아줄을 잡은 오누이의 느낌을 알 것 같았다. 


과목마다 요구사항은 다르지만, 길이는 보통 8,000 - 10,000자. A4 용지로 20-25페이지는 빼곡하게 채워야 완정되는 분량이고, 참고문헌까지 들어가면 거의 논문 한 편이다. 물론 쓰거나 발표를 한다고 바로 학점이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내 시험 성적보다 더 좋은 점수를 paper나 발표로 받아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상담을 한 다음 시간에 교수님들은 강의 시간에 다시 한 번 research paper나 research 발표로 학점을 일부 대체할 수 있다고 공표하시고, 지원자를 받으셨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과목에서 나 혼자만 지원을 했고, 한 과목에서만 다른 학생 한 명이 지원을 했다. 아니, 학점에 목숨을 거는 로스쿨에서 학점 20-30%를 만회할 수 있는데 왜 지원을 하지 않을까? 나중에 동기들에게 물었다. 왜 paper를 쓰거나 발표를 하지 않느냐고. 대답은 다 비슷했다. 


공부만 해도 시간이 없는데 거기에까지 쓸 시간 없어, 20-30 페이지 논문은 써 본 적이 없고 쓴다고 해도 논문 점수가 내 시험 점수보다 높아야 의미가 있는 건데 그냥 시험에 집중하는 게 나아, 난 발표가 싫어, 등등.


나에게는 한 줄기 빛 같았던 길이었지만, 동기들에게는 있느나 마나한 옵션이었던 것이다. 


비록 분야는 달랐지만, 나는 한국에서 연구자로 근무하면서 논문을 몇 편 써 보았기에 research paper를 쓰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보다 솔질하게 말하면 내 시험 성적보다 낮은 점수를 받지는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고), 이후 마케터로 근무하는 동안의 수 많은 발표 경험이 있어서 발표도 꺼려지지 않았다. 


물론 분명 무리수이기는 했다. 학업도 따라가기 벅찬데, research라니. 친한 친구 한 명도 시험에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재고를 권했다. 하지만, 이번 학기도 학점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로스쿨은 접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텼고, 밤 잠없이 쪽 잠으로만 때우는 시간을 보내면서 3편의 글과 한 번의 발표를 마쳤다. 그렇게 해서 받은 학점은 간신히 로스쿨 평균. 


그래도 그렇게 한 학기 더 살아 남아 다음 학기를 볼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영어도 편안해 져서 2학년 2학기부터는 나도 research paper도 안 쓰고, research 발표도 하지 않아도 크게 부끄럽지 않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1학년 2학기의 무리수가 나에게는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그리고 나는 말로만 듣던 두 가지를 경험했다. 


내가 어제 쌓은 경험과 지식은, 당장은 아무리 소용이 없어 보여도 어떤 식으로든 내일의 나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거. 그리고 아무리 빠른 지름길이 있어도,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만 비로소 길이 된다는 거 - 물론 지름길이 필요없다면 그건 부러운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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