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와 장난감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짧은 기간동안 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쳤다. 베이스 기타라는 악기를 접해 본 적이 없었으니, 처음에는 곡을 들어도 뭐가 베이스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고, 음감이 나쁜 편은 아닌데도 음이 잘 분간이 되지 않아 조율을 하기 어려웠다.
조율이 안 되는 건 악기가 낡아서 그래 - 라고 핑계를 댔다. 대부분의 밴드가 그랬겠지만, 베이스 기타뿐만 아니라 전자 기타며, 드럼이며, 건반이며, 악기는 다 낡은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과외 알바로 돈을 잘 벌던 건반 담당 동기가 종로 2가에 있는 악기상가에 가서 건반을 새로 샀다고 했다. 다들 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 건반은 조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엄청 비싼가보다. 음이 달라지지 않으니 조율이 필요 없는 거잖아 - 완벽한 건반이로구나. 피아노도 조율이 필요없다면 얼마나 관리가 쉽겠어.
하지만, 선배들의 생각은 달랐다. 새로 산 건반이 조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들은 복학생 밴드 선배의 첫 마디는 내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악기야.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악기가 악기도 아니라니. 선배들의 입장은 간단했다. 환경이 그대로라면 모르겠지만, 환경이 변하는데 음이 달라지지 않는 악기는 없다. 온도도 습도도 다 달라지게 마련인데, 그 때마다 음을 조율할 수 없다면 그건 제대로 된 악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건 그저 장남감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이 항상 섭씨 25도에 상대습도 75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유지한다면, 나는 변화에 적응할 능력이 없어도 전혀 없어도 생존에 문제없는 완벽한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이 여름엔 땡볕이 쏟아지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곳이라면, 나를 환경에 적응시킬 수 있어야 비로소 생존에 완벽한 기본 조건이 충족된다.
내 삶에는 변화가 너무 많았다. 이렇게 변화 많은 삶은 주위에서 찾이 어려울만큼 많아서, 내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변화가 지겨웠다. 그래서 나는 한 때 나를 조율할 필요가 없는 삶을 꿈꾸었다. 속된 말로 금수저의 삶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를 조율할 필요가 없는 삶 처럼 보였고, 우스갯소리로 재벌 2세가 꿈인 적도 있었다. 재벌 2세면 내게 조율을 강요하는 환경의 변화는 훨씬 적을 것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변화해야 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라고 모두가 이야기 하는 지금, 내가 있는 환경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건 너무 순진하다. 사실 금수저는 소수이니 오히려 서 있는 곳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그러니, 원하든 원치 않든 닥쳐올 그 변화 속에서 완벽한 삶을 사는 방법은 하나, 나를 조율하는 것 뿐이다. 환경의 변화 속에서 조율이 안 되는 악기는, 악기가 아니라 그저 장난감일뿐이다.
오늘도 조율을 해야 하는 생활, 그리고 내일도 새로이 조율을 할 것이 뻔한 생활, 그렇게 조율을 해 가야만 하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완벽한 삶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장난감이 아니라 악기로 만들어 주는 삶인지 모르겠다.
장남감이 되기 보다는 악기가 되는 것이 보람차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