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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Sep 04. 2023

얼룩은 무늬가 될 수 있을까?

너니까 되는 거라고 말하지 말자

올 여름이 시작될 때 즈음 토론토 대학 (University of Toronto) 로스쿨에 재학 중이 1학년 학생이 우리 사무실에 summer student (여름 방학 인턴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로 지원을 했다. 


한국에서 이과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에 있는 로스쿨을 다니다가, 아무래도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판단해서 캐나다 로스쿨을 준비하고, 지원해서, 합격했다고 했다. 영주권도 없어서 안 그래도 비싼 로스쿨 학비를 남들의 3배를 내 가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물론 캐나다 로스쿨을 다닌다고 해서 한국의 로스쿨을 다닌 것보다 더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캐나다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 평생 "visible minority"라는 딱지를 달고 소수로 살아야 하니, 그레 비하면 한국에서는 대기업 회장이든 말단 사원이든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류로 사는 셈 아닌가. 


하지만, 이 친구에게는 내가 자기 계발을 권하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캐나다에서도, 내게 길을 자문해 달라는 사람은 많았고, 자발적으로 자문을 준 적도 많았다. 그 때 내가 흔히 듣던 반응은 이거였다.


그건 너니까 되는거지.


너는 서울대 나왔잖아, 너는 박사잖아, 너는 외국 회사 다니잖아, 너는 말을 잘 하잖아, 너는 이제 영주권이 있잖아, 너는 로스쿨 나왔잖아, 너는 대형 로펌을 다녔잖아 ....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것들을 행동하지 않을 핑계로 사용할 뿐이지, 그 말의 이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의 실적을 올리려는 교감 선생님에 의해 고등학교 3년 내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던 학과로 팔려간 것이라든지, 그래서 그렇게 하기 싫었던 공부를 왜 뒤늦게 다시 시작해서 학위까지 취득했는지, 남들은 10년도 안 걸리는 그 과정에 내가 몇 년을 썼는지, 내가 어쩌다가 외국 회사를 다니게 되었는지, 내가 어떻게 세미나를 준비하는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주권이 없어도 로스쿨을 갈 수 있는지, 내가 로스쿨을 어떻게 졸업했는지, 로펌에 입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을 알아보고 시도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너는 무늬이고 나는 얼룩이야. 얼룩은 무늬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무늬가 아닌 얼룩이 어디 있을까. 얼룩이 하나면 얼룩으로 그치지만, 얼룩도 모이면 무늬가 된다.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없이, 심지어는 영주권도 없이, 시간을 들여 LSAT를 치르고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 로스쿨에 발을 디딘 그 학생은 아쉽게도 우리 사무실에는 빈 자리가 없어서 고용을 하지는 못했지만, 더 좋은 곳에 summer student 자리를 얻었다. 


그 학생에게는 지금 앞 길이 없고, 있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늘의 수업을 듣고 내일의 시험을 준비하는 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부족한 것이 많으니 나는 얼룩이야 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으로 나는 무늬를 만들거야 라고 말하는 그 학생에게는 계속 나아갈 길이 열려갈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그 학생은 부족함으로 무늬를 만들 것이라는 것을.


모든 무늬가 얼룩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모든 얼룩은 무늬가 될 수 있다. 얼룩말과 기린의 무늬가 아름답지 않은가. 없는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있는 것과 가진 것에 촛점을 맞추고 하나씩 모아가면, 얼룩은 언젠가 무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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