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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Sep 05. 2023

첫 오픈북 시험의 악몽

없는 것이 나은 희망에 기대었다가 후회한 이야기

로스쿨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로스쿨 시험은 대부분 오픈북이라는 걸 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자료를 가지고 들어가서 시험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한 번도 오픈북으로 시험을 본 적이 없던 나에게는 일단 로스쿨 시험이 모두 오픈북이라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더랬다. 


법전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기한 내용, 참고도서 등 제한 없이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자료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더 안심이 되었다. 모르면 찾아보면 된다는 생각이 주는 위안은 컸다. 


물론 선배 학생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학생들은 당연히 나보다 15년 이상 어렸지만)이 주는 경고 사항도 있었다. 


"간단한 판결문 확인이나 법 조항 확인 등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책을 펼쳐서 답을 찾아야 하는 순간 좋은 학점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오픈북에 가지고 들어가는 서류는 심리적 안정용으로만 사용하고, 자료 없이 시험 답안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지고 들어가는 자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그래도 오픈북이라서 마름이 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첫 시험이 있는 날, 나는 바리바리 자료를 챙겨서 한 포대를 들고 일찌감치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험장 입장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영한 사전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자 사전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며 (통신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종이로 된 것이라도 사전류는 영불 사전이나 불영 사전만 용납한다고 했다. 아니, 내게 영불 사전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오픈북 시험에 굳이 영한 사전을 지참하지 못하게 한 이유를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영한 사전을 시험장 밖에 놓고 들어가면서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그래, 대학원을 두 번이나 입 학하고 졸업하면서 영어 시험 치느라  단어 공부는 많이 했잖아. 어원 공부도 했으니 단어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거야 - 그래, 괜찮을거야.


하지만, 주어진 시험 문제를 읽으면서 나는 절망했다. 지문은 영어로 주어졌지만, 내가 모르는 불어 단어가 2개나 들어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하나는 cul-de-sac. 막다른 길을 의미하는 말일데, 불어에서 시작된 말이지만, 영어에서도 그대로 쓰이는, 영어 입장에서는 외래어인 단어였다. 나중에 풀고 보니 시험 문제에 꼭 필요한 단어도 아니었는데 (그냥 way, road 이렇게 써도 되는 문제로 기억한다), 게다다 꼭 그 불어를 쓸 필요도 없었는데, 도대체 왜 그런 말을 사용하셨는지 교수님이 원망스러웠다. 


불영 사전은 아니더라도, 영영 사전이라도 가지고 왔어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 해석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도 잠시, 불안해서 그런지 갑자기 중요한 판결문들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으니 어쩌랴 - 가지고 간 자료를 넘겨볼 수 밖에 없었는데,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만 있는 중에 나 혼자 페이지를 넘기는 종이 소리를 내고 있으니 마음은 더 불안해 졌다. 게다가 교과서와 참고 서적을 앞 뒤로 뒤져가며 답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렇게 첫 시험을 망치고 보니, 오픈북 시험이라고 모든 자료를 다 가지고 가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마음만 편했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다음 시험부터는 최대한 내 손으로 정리를 하고, 정리 내용과 법전만 가지고 갔는데, 오히려 답안을 작성하면서 참고하기에는 그 방법이 훨씬 좋았다. 물론 영영사전은 빼먹지 않고 매 번 가지고 갔다. 


내가 첫 시험에 가지고 간 자료들을 내가 다 이해하고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좋은 학점을 받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으니 대신 나는 그것들을 내게 답을 알려줄 희망으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 자료들은 대초에 그렇게 사용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이었는데, 거기에 기대다가 첫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그 후, 내게 멘티가 생겼을 때, 나도 예전 선배들처럼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오픈북이라고 해도, 자료를 펼쳐서 답을 찾아야 하는 순간 좋은 학점은 물 건너간 거야.


오픈북의 위안에 혹해서, 그 희망에 학점을 베팅한 것을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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