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광훈 Oct 09. 2023

첫 번째 자퇴생

우등생이 왜 자퇴를?

로스쿨 첫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좀 넘어, 첫 번째 자퇴생이 나왔다. 캐나다는 모르겠지만, 미국 로스쿨에서는 1/3이 자퇴를 하거나 퇴학을 당한다는 말을 듣고 로스쿨에 온 것이라서 자퇴자가 있다는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퇴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는 놀랐다. 


학기가 시작되면, 수업 중 발표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대충 다른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이 많은 학생들이 소위 실력있는 친구들로 구분된다. 물론 나중에 보니 말이 많은 친구들이 항상 성적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성적으로도 우등생들이었다. 


보통 말이 많다는 것은 교수님이 시키지 않은 말을 한다는 것이고, 교수님이 시키지 않은 말을 한다는 것은 나름 예습을 충분히 하고 왔다는 뜻이었다.  기말고사 성적을 미리 알 수는 없지만, 그 정도 예습을 하고, 이해를 하고, 교수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발표를 할 수 있다는 건 그들이 좋은 성적을 받을 것이라 짐작하게 하는 보조 수단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자퇴한 학생은 약 300명이던 동기들 중에사도 상위 열손가락 안에 꼽는 백인 여학생이었다. 다들 대학교 시절에 한 가닥 하고, LSAT 점수도 잘 받아 로스쿨에 입학한 동기들 중에서도 그 여학생은 분명 돋보이는 존재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나는 그 '열 손가락 그룹'들하고는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나는 친하고 싶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서류를 제출하러 왔을 때 우연히 마주쳤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물어 보았다 - 왜 그만두느냐고. 


대답은 생각 외로 간단했다. 자신이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로스쿨이 본인에게 잘 맞지 않는 것 같다서 그만 둔다고.


조금 충격적이었다. 아니, 네가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는 말인가. 


그리고,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본, 서울대 입학식에서 매년 총장님들이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는 환영사가 생각이 났다. "여러분은 고등학생 시절에 반에서 혹은 학교에서 1,2등을 다투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여러분 중에서 꼴찌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여학생은 대학교 성적이 좋았을 것이고, 리더쉽도 있어서 따르는 친구들도 많았을 것이고, 백인이니 차별도 겪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마도 그 여학생은 '로스쿨에서도 내가 낭중지추가 되리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입학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다들 좋은 학점에, 다들 꽤 높은 LSAT 점수를 받고 로스쿨에 입학한 동기들 사이에서, 그 여학생은 아마도 본인이 만족할만한 위치에 서지는 못했던 것 같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해서 잘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충분히 잘 하지 못한다는 그 생각이 길어지면 적성이 아닌가보다..., 잘 맞지 않는다... 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잘 하고 있으면서도 잘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중에 보니 내 중국인 동기 중에도 좋은 대학, 좋은 과를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농담처럼 이야기하기를, 자신은 대학 졸업 후에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하게 되면 "안녕? 내 이름은.." 이렇게 소개하지 않고 "내 학점 보여줄까?" 이러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로스쿨에서는 그런 위치에 설 수 없어서 1학년 때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 여학생의 자퇴 결정은 내 기준에서는 사치였다. 1등을 해야만 적성에 맞고, 군계일학이 되어야만 잘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로스쿨은 D만 받으면 졸업할 수 있으니, D를 받을 수 있다면 적성에 맞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 여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로스쿨을 졸업하고, 자신이 되고 싶었던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질 기회를 너무 일찍, 그리고 내 기준으로는 너무 허무하게, 내 던졌다. 


그 여학생은 자신의 한 달이 실망스러웠고, 실패했다 생각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지금 서 있지 못하는 것은 실패도 아니고 실망할 일도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길 걷기를 포기하는 것이 실패이고 실망할 일이다. 


그러고 보면 때때로, 그저 견디는 것이 능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D만 맞으면 돼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