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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Dec 08. 2022

각고가 뭔지 알아?

배수의 진은 치고 싶어서 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어느 날처럼 지방 출장 일정을 마치고 선임자와 함께 목욕탕/사우나를 갔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하대리처럼, 지방 출장을 다녀오면 사우나를 하곤 했다. 


탈의를 마치고, 탈의실 옷장 열쇠까지 잠그고 막 돌아서는데 옷장 안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옷장을 향해 몸을 돌리고 고민했다 - 다시 옷장 문을 열고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사이 전화가 끊겼다. 그래서 다시 몸을 돌려 탕으로 향하려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받아야겠네, 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옷장 문을 열고 전화를 받았다.  


번호가 조금 이상하게 뜬다 – 스팸인가 했으나 기왕 옷장 문을 열었으니 받았다. 얼마 전에 미국 MBA로 유학을 간 직장 후배다.  나보다 입사는 늦었으나, 원만한 대인관계와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이던 친구였는데, 함께 MBA를 오래 고민하다가 나보다 먼저 용기를 내고 휴직을 하고 유학을 갔다. 


그런데 도저히 못하겠단다. GMAT 점수도 나쁘지 않았고, 평소에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경영 공부도 꾸준히 해서 학업 자체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다며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생각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뒤돌아봐 - 다시 건너올 다리가 보여?


사실 MBA 유학을 갔을 때, 돌아올 다리는 끊어진 것이었다. MBA 유학이라는 모험을 하는 것은 그 후에 있을 더 큰 열매를 위한 것 아닌가. 2개월만에 MBA를 포기하고 돌아오면, 능력있는 친구이니 재입사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그렇게 꼬리표가 붙으면 목표로 하던 country head 나 regional manager 으로 올라가기는 힘들 것이었다. 더 큰 열매는 없을 것이었다. D도 도배된 성적표를 받더라도 거기서 졸업을 하고 와야 하는 상황이 이미 되어 버린 것이라고 오래 설득했다. 너무 힘드니 돌아올 생각을 한 것이겠지만, 돌아오는 건 이미 선택지가 아니었다. 다리가 없으니 딴 생각 하지 말라고 조금 잔인하게 말해주었다. 


다른 길이 없는 것 - 그게 배수의 진이다. 직장을 다니다 보면, 배수의 진은 늘 미리 계획하고 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된다. 


배수의 진을 친다고 늘 용기백배해서 일당백의 기백이 나오는 건 아니다. 배수의 진을 치면 먼저 두렵다. 막막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외롭다. 그러니, 내가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치기는 쉽지 않고, 배수의 진 안에서는 약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 후배에게는 지금 배우는 교재 중에서 한글로 번역된 것을 찾아 사서 보내주기로 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졸업은 하는 것으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때 보낸 한글 서적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후배는 MBA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후, 지금은 자신의 consulting 회사를 차려 북미와 아시아 지역의 다국적 회사들을 상대로 consulting을 하는 위치가 되었다. 배수의 진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한 거다.


그런데, 어떻게 배수의 진을 탈출해야 할까?


내 첫 회사에는 업무 능력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과장님이 계셨다. 이사님이 계시든, 부장님이 계시든 신경쓰지 않고 1시간의 점심시간 중 30분은 꼭 회사 컴퓨터로 게임을 하시는 독특한 분이셨다. 그런데 업무 처리 속도나, 다른 부서와의 협업이나, 내년 사업 계획이나 어느 분야든 탁월하셨고, 뭘해도 항상 그 분이 중심이고, 부장님이나 이사님도 그 분께 의지해서 부서가 운영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야근 후 회식을 하면서 동기 3명과 함께 여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 그러자 지금도 기억나는 한 마디를 해 주셨다. 


너희들, 각고가 뭔지 알아?


매일 점심 시간마다 노는 것 차럼 보여서 몰랐지만, 그 과장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 거다. 


사실 나도 로스쿨에 진학하고서는 그 후배와 똑 같은 경험을 했다. 첫 학기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지금이라도 MBA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리고는, 내가 몇 년 전에 그 후배에게 했던 말이 떠 올라서 미안했다. 돌아올 다리는 이미 끊겼다고 남에게 말하기는 쉬웠는데, 내가 그 자리에 서니 다리가 남아 있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고 미련이 남았다. 


어쨌든 나도 나름 배수의 진을 탈출한 지금 생각하면 배수의 진을 탈출하는 방법은 각고, 하나 뿐이다. 그리고 내가 치고 싶어서 쳤든,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되었든, 내가 처한 상황을 바꾸려면 배수의 진을 한 번은 거쳐야 한다. 


어쩌면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은 적어도 3번은 배수의 진을 통과해야 목표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배수의 진을 치고, 각고로 승부하라고 잔소리 한다. 기왕 거칠 배수의 진이라면 남에 의해 혹은 상황에 의해 배수의 진에 들어가지 말고, 내가 스스로 치는 것이 좋다고 잔소리 한다. 


진절머리 나는 것이 배수의 진인 줄 알면서 말이다. 난 참 잔인한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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