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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Dec 08. 2022

승진 탈락이라는 복을 받은 우리들

병아리, 계란 프라이, 그리고 프라이드 치킨

이 글은 '직장-인'과 '직-장인'이라는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이에 대한 짧은 글 (https://brunch.co.kr/@e5c821d0bd7b442/9) 을 먼저 읽고 오시면 아래 내용을 더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의 웹툰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다고 한다. 나름 자부심도 생기는 일이다. 한국의 웹툰이 북미에 알려진 지는 꽤 되었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 내 아들, 딸이 초등학교 학생이던 시절, 노블레스라는 한국 웹툰은 한국에서 전날 올려진 내용을 캐나다 학교에 등교해서 (그러니까 하룻밤 만에) 영문판으로 볼 수 있었고, 캐나다 현지 백인 아이들도 매 주 노블레스가 나오는 날이면 서로 먼저 찾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초등학생 아들과 딸은 나를 웹툰의 셰게로 끌어들였고, 이제 나는 매일 3-4편의 웹툰을 고정적으로 읽는다. 그런데, 요즘 인기있는 웹툰들 추세를 보면 미래를 알고 진행하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경우가 점점 많아진다. 내가 읽은 소설이 현실이 되어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내가 즐기던 게임 내용이 현실이 되어 내가 주역이 되고, 내가 과거로 회귀하여 미래를 아는 상태에서 영웅이 되는 그런 내용들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불확실성만큼 더 불안해져서, 그래서 미래를 알고 모든 일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주인공의 영웅담에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를 모른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니까. 


하지만, 미래가 어느 정도 예측이 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을 수도 없이 들어서 알지만, 보통 우리 스스로를 그 물방울에 비유하며 바위가 뚫릴 때까지 그저 끝없이 노력하라는 뜻이구나.. 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직장에서 우리는 물방울이 아니라 바위다. 변화없이 지나가는 순간순간이 물방울이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바위같던 내 삶에 어느 새 구멍이 나는 것을 목격할 수 밖에 없다. 물방울이 나를 뚫어낼 것이라는 건, 외면 한다고 해서 변하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부장님, 이사님의 모습이 나의 미래라고 생각하면 힘이 없어진다”고 말하지만, 달리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건 위기감이 작아서이고, 아직은 현재가 버틸 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방울을 받아내며 버티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시작은 자꾸 늦어진다. 


그런데, 다행히도 가끔씩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순간이 찾아 온다. 물방울이 갑자기 두 배, 세 배로 커지는 때가 있어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고, 커진 경각심은 우리를 행동할 수 있게 한다.   


내가 다니던 다국적 회사에서 어느 날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봉급 시스템을 적용시키기로 했다고 통보가 왔다. 매년 누구나 조금씩 월급이 인상되는 형태는 더 열심히, 더 잘  일하는 사람에게 불합리하므로 이에 맞는 봉급 시스템을 도입한다는 취지였다. 


지금까지는 내 월급은 회사하고만 이야기하는, 내 성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성과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대 평가제도에서 살게 되었다. 그래도 입사 동기간에 월급 차이는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그렇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잘 해도 회사의 전체 성적이 좋지 않아 총 인상액이 별로 오르지 않는다면 월급인상은 물 건너 간 것이고, 우리 부서가 잘 하고 나도 잘해도 내 동료가 나보다 더 잘 했다면 월급 인상 폭은 작을 것이다.  


이런 순간이 물방울이 갑자기 몇 배로 커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직장-인에게 주는 신호다. “나”라는 그릇에 한 방울씩 떨어질 때는 30년을 버틸 수 있었지만, 물방울이 커지면 20년, 10년 만에, 어쩌면 5년만 지나도 물이 넘치기 시작할 지 모른다.   


승진 탈락은 또 다른 신호다. 내가 임원 승진에서 탈락했을 때, 처음에는 대리나 과장 승진에서 탈락했을 때 보다도 충격이 크지 않았다. 대리나 과장처럼 저절로 올라가는 자리가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길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승진 탈락이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고, 내게는 승진 탈락이 새 길을 찾고 새 기회를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임원 승진 탈락이 내게는 축복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고, 승진 탈락으로 새 길을 모색할 동기를 얻은 모든 사람에게도 축복이다. 직장-인에서 직-장인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다. 


내가 알을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알을 깨면 계란프라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승진 탈락처럼 나름 무게있는 충격은 알을 깰 생각이 들게 하니, 내가 병아리가 될 확률을 높인다. 물론 병아리가 되어서도 끝이 아니다. 알을 낳을 수 있을 때 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 전에 프라이드 치킨이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 조마조마함이 일상이라면 매일매일이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으니 불안하겠지만, 적어도 계란 프라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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