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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과 달리기

natural high와 단기속성 과정

by 신광훈


상법 시간이었다. 꽤 이름있는 교수님이라 학생들이 많았다. 그 날 배울 상법에 대해 강의하시고 몇몇 판례를 논의한 후 예의 소크라테스식 수업, 질문이 시작되었다. 교수님이 한 학생을 지목해서 질문하자, 지목된 학생이 자신있는 목소리로 열심히 답변한다. 쫌 길다. 그래도 막힘없이 줄줄 법과 판례와 자신의 생각을 읊어낸다. 부러웠다.


그런데, 답변이 끝나자 교수님께서 턱을 괴고 아주 잠깐 뭔가 생각하시더니, 씩 웃으시면서 묻는다.


그거, 어느 교수한테 배운거야?


교실 여기 저기서 박장대소를 한다. 알고보니, 그 학생은 작년 족보를 보고 있던 것이었고, 다음다음 시간 내용까지 정리된 내용을 쭈욱 읽은 것이었다. 같은 족보를 가지고 있던 학생들은 그걸 알고 웃은 것이고, 교수님께서도 그 학생이 족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신 것이었다.


멋적어하는 그 학생을 두고 한 바탕 웃음이 지나간 후, 교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There is nothing like a natural high.


High란 일종의 환각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마약에 취해 있는 상태를 보통 'high'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high에 도달하는 방법이 꼭 마약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기를 하는 분들은 runner's high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오래 달리다시 육제척으로 힘든 고비를 넘긴 후에는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은 도취감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마약에 취하지 않고도 high 상태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족보를 보면서 쉽게 공부하는 것을 마약을 사용해서 high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고, 그런 high 보다는 달리기와 같은 힘든 과정을 거치고 얻은 high가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거다. 아무 독서도 없이 족보만 외우는 편법을 써서 도달한 high는, 제대로 책을 읽고 판례를 공부해서 다다르는 경지에서 느끼는 highd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내 대학교 1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과 선배들과의 첫 모임에 선배 한 분이 말씀하셨다 - "지금까지는 모든 고등학교에서 국어로 된 교재와 참고서를 가지고 공부했겠지만, 이제는 모든 교재가 이제 영어로 된 원서이다. 당연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번역본을 보면 안 된다. 족보에도 기대면 안 된다. 번역본 보지 말고, 족보 구하지 말고 꾸준하게 단어 찾아가며 원서 읽는 연습을 1학년 때 해야, 2학년 이후 졸업 때까지 전공 과목들도 무리없이 따라갈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동아리 활동에 5개나 가입했던 나는 도저히 원서를 읽어낼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없었고, 그 말에 신경 쓸 수 없었다. 특히 지금도 기억나는 건 Campbell Biology 라는 교재를 사용했던 생물학. 고등학교때 화학과 물리를 선택했던 내게 원서로 된 생물학은 높은 벽이었다. 단어를 찾아가며 교재를 읽다보면 1페이지를 넘기는 데에 몇 시간씩 소요되는 일이 흔했다. 그 시간이면 동아리 두 개는 더 챙길 수 있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조금씩 익숙해지면 되지, 라고 생각했으나 동아리 활동에 시간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영어를 멀리하게 되었고, 원서가 조금씩 익숙해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익숙해지지 못해서 고학년이 되어서도 족보를 떠날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공 분야에서 박사 논문도 영어로 쓰고 왔으니 그나마 어느 정도 전공 영어는 극복이 된 셈이지만, 어쨌든 대학교 1학년 때 생물학을 족보로 공부한 건, 달리기 대신 마약을 선택한 것과 같은 실책이었다.


1세로 로스쿨 공부를 해 보니, 교수가 요구하는 reading 의 분량은 독해가 느린 1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교 1학년 때처럼 동아리 활동을 하고 술 마시느라 그런 거라면 억울하지도 않겠지만, 주중에는 하루에 2-4시간만 자면서 읽고, 또 읽어도 도저히 제대로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수업도 그러니 당연히 시험은 족보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어떤 학생들은 놀기 위해 족보를 보기도 하건만, 1주일에 7일을 읽고 쓰는 일에 써도 시간이 늘 부족해서 족보를 봐야 하는 건 억울했다.


그래도 시험이 아니라면 족보에 기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대학교 1학년 시절의 실수가 뼈 아팠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Campbell Biology 그 놈 만큼은 원서로 승부를 했어야 했다는 후회 덕분이다.


어디에나 쉬운 길은 있고, 단기 속성 과정도 있다.


그건 대학교 시절에도 그랬지만, 로스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유혹은 크다. 떨쳐내기 어렵다. 그래도, 과거의 실수 덕분에, 비록 온전하게 Natural High를 느긴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마약성 high는 피하고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이 추후 로펌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 그건 나름 복이라면 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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