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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Nov 08. 2023

바리스타 할래, 아님 바리스타 할래?

소송법 교수님의 일갈

모든 캐나다 로스쿨에서는 1학년 때 각 주마다 정해진 소송절차에 대해 배운다. 


회사에서 일할 때에는 문서의 형식이 꽤 중요했다. 맞춤법도 중요했다. 그런데, 로스쿨을 다녀보고 로펌을 다녀보니, 사실 그런 것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파트너 변호사들은 문서에 오타 하나라도 있으면 노발대발하고, 모든 문장에 본인이 원하는 단어와 다른 단어가 하나라도 쓰이지 않기를 요구했지만, 그건 그저 그 분들의 욕심과 명예 때문일 뿐이었다. 


기말고사에서든 소장에서든 어떤 내용을 말하는 지가 중요한 것이지, 철자법이 틀리고, 문법이 틀리다는 건 학점이나 승소/패소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영어로 법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이었다. 영어는 틀려도 내용은 틀리지 않으면 되니까.


하지만, 예외가 있었으니 그게 소송 절차다. 소송에는 지켜야 할 절차와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이를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내 고객의 입장이 설득력이 있든 없든 패소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나는 이 과목이 싫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내용을 그저 하나하나 따져가며 따라야 하는 이 과목이 싫었다. 그런데, 아마 다른 친구들도 그랬나보다. 법리를 따져가며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다른 과목에 비해 절차를 그저 익히고 따라야 하는 이 과목이 지루했나 보다. 그리고 그걸 교수님께서는 알아채셨다. 뭐,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매년 그랬을테니. 


그래서 그랬는지 어느 날 교수님께서 본인이 일하시던 로펌에서 발생한 사례를 하나 말씀해 주셨다. 


소송을 할 때 상대방에게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그 때 모든 자료를 다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 자료 (예를 들어 고객과의 상담 내역 등)는 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 그래서 소송을 할 때에는 상대방 변호사 사무실에 제공할 자료와 그렇지 않은 자료를 나누어서 따로 관리한다. 


그런데, 어느 신입 변호사가 상대방 사무실에 서류를 바꾸어 보냈다. 보내야 할 자료를 보내지 않고 기밀 자료를 보내버린 것이다. 보내고도 그 로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료를 받은 로펌에서 상대방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자료를 돌려보내고 본인들이 첫 번째 페이지를 읽었음을 고지했다. 판사에게도 알렸다. 


그래서 그 신입 변호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당연히 다들 궁금했다. 교수님이 대답했다. 


바리스타를 꿈꾸던 그 변호사는 지금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 하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인가. 


캐나다는 한국처럼 "변호사" 라는 자격을 하나로 주는 것이 아니라 "소송변호사"는 Barrister, "서류변호사"는 Solicitor 라고 지칭한다. 영국의 시스템을 따 온 것이지만, 캐나다는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하지는 않는다. 웬만한 변호사는 두 가지 일을 다 한다. 그런데, 소송 변호사를 뜻하는 Barrister의 발음이 커피 전문가를 뜻하는 Barista와 발음과 비슷하다. 영어로도 그렇지만 국어로 써 보면 둘 다 바리스타다.


그래서 처음 캐나다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내 명함에 있는 Barrister & Solicitor라는 명칭을 보고서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하느냐고 묻거나, 왜 변호사도 바리스타고 커피 전문가도 바리스타냐고 묻는 분들이 의외로 많았다. 


어쨌든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를 한다니, 실수한 그 신참 변호사는 아마도 짤린 것이리라. 갑자기 교실에 긴장감이 돈다. 소송 절차 우습게 보고 제대로 공부 한하면 니들도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하는 수가 있어, 라는 교수님의 일갈이니까.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Barista 분들을 낮춰 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Barista를 하려고 그 비싼 학비 내면서 로스쿨을 다니는 건 아니니까. 


지나고 보니, 로스쿨에는 이것 저것에 도전할 기회도 있었지만, 대신 이것을 선택했으니 저것을 포기하겠다고 할 이유도 넘쳐났다. 바리스타와 바리스타의 갈림길은 생각 외로  흔했고, 생각 외로 내 결정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포기한 것이 많기는 했지만, 이 수업 이후에는 포기하기 전에 꼭 한 번 나에게 물어본다.


바리스타 할래, 아님 바리스타 할래?


 한 번쯤 포기를 늦춰주는, 나만의 주문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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