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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Nov 13. 2023

돈이 없으면 부담이 없어요

스트레스 듬뿍 받는 그 날을 위하여!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은 대학생이 맥주 마시기 어려운 때였다. 소주에는 라면, 막걸리에는 두부를 먹는 것이 기본이었고, 어쩌다 맥주를 마실 때면 부추 김치를 안주로 “500cc 한 잔에 부추 한 점”의 마음으로 마셨더랬다.  


다행히 그 당시에는 또 과외 알바 자리도 흔하게 있어서 나나 친구들 대부분 과외 알바를 했기 때문에, 월급 날은 소주든 막걸리든 맥주는 한 잔 사는 날이었고, 라면도, 두부도, 부추 김치도 아닌 안주를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대학은 제각각이었어도 일 주일에 두 번 이상씩은 꼭 보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있었는데 술자리는 항상 그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한 친구가 꽤 오랫동안 알바 자리가 없었다. 당연히 술 살 기회가 없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누가 술 값을 내는 것이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가 술 값이 없다고 하면, 뛰어나가 전당포에 내 시계를 맡기고 술 값을 내 주던, 그런 친구들이었으니. 


그런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그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돈이 없으면 부담이 없어요.” 


맞는 말이다. 술 값낼 돈이 없는데, 술 값 걱정을 할 일이 뭐가 있겠나. 술 값 안 낸다고 뭐라하는 친구도 없고, 그저 함께 있는 것으로 즐거워 해 주니, 그저 마시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 때는 한바탕 웃고 넘어 갔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마 그 녀석은 내심 미안했던 것이 아닐까. 다시 떠올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부담없는 나날들은 과연 마음이 편안한 나날들일까. 


부담은 "어떤 의무나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정의 되어 있으니, 다른 말로 하면 부담은 내가 할 역할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내가 술 값을 내든, 내가 리포트를 써 내든, 내가 세미나를 진행하든, 뭔가 내가 해 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게 보면 나의 능력은 모든 스트레스의 시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일지 몰라도 그 분량이 많으면 스트레스가 된다. 내가 해 낼 수 있는 일이라도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면 스트레스가 된다. 내가 결국은 해 낼 수 있는 일이지만 당장의 능력에는 벅차서 공부를 더 하고 노력을 더 해야 하면 스트레스가 된다.  


하지만, 그런 스트레스는 어찌보면 나를 나아가게 하는 스트레스요, 나의 의미를 새겨주는 스트레스다. 


내가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그런 곳에서는 내가 부담을 가질 일이 없다. 


술 값을 낼 돈이 없고, 리포트를 쓸 실력이 없고, 세미나를 진행할 능력이 없다면, 아무도 내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다. 보통 스트레스는 내가 짊어진 의무나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니, 부담이 없다면 스트레스도 없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담이 없는 그것 역시 스트레스의 시작이다.  


아쉽게도 사람은 아무 부담도 없을 때, 오히려 부담감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 듯 하다. 술 값이 없으면 술을 그냥 마시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신경이 쓰여서 한 마디 농담이라도 건네야 하고, 아무 일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고 월급 받는 것이 신경쓰이고 남 보기 창피하다 하여 사표를 던지게 된다.  


콜레스테롤에도 좋은 콜레스테롤과 나쁜 콜레스테롤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스트레스도 그렇다. 부담감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좋은 스트레스요, 부담이 없어서 생기는 스트레는 나쁜 스트레스다. 


그렇게 보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 아니라 삶의 활력의 근원도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가득한 하루가 어쩌면 나의 가치를 보여주고 높여주는 그런 하루일 지도 모르니, 좋은 스트레스라면 기꺼이 환영해 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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