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광훈 Dec 23. 2022

인연의 가벼움

어디 가벼운 인연이 있으랴마는

COVID-19 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한 남자 분께서 아내가 사망한 후의 서류 처리를 위해 약속도 없이 방문하셨다. 미팅은 약속이 잡힌 경우로만 제한하던 때였지만, 다른 건도 아니고 배우자 사고 사망 건인지라 일단 리셉션에 모시고 나는 서류를 받아 가지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서류를 검토하는데, 갑자기 리셉션에서 꺼이꺼이 목놓아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의 울음 소리다. 


캐나다에 올 때 일가친척이 다 오는 경우는 드물다. 나처럼 한 가족만 달랑 오는 경우가 많다보니, 집안에 일이 있을 때 일을 맡아 해 줄 친지가 없다. 사람이 죽으면 처리할 서류들이 한 가득이다. 그 많은 일은 대부분 남은 배우자의 몫이니, 아내를 보내고도 맘 놓고 슬퍼할 겨를이 없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서류 처리를 하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다. 이렇게 짬을 내어, 틈틈이 아내를 기억하는 수 밖에 없다. 서류가 넘어가는 사이사이에 아내를 보낼 수 밖에 없다. 오죽하면 변호사 사무실에 와서야, 리셉션 의자에 앉아서야 울음이 터지겠는가.  


꺼이꺼이 하던 통곡소리가 꺼억꺼억하고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소리로 변했지만, 모든 울음에서 그 동안 쌓아온 인연의 무게가 느껴진다. 허전함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래서, 남편의 울음을 듣는 우리들의 마음도 아팠다. 


하지만, 이렇게 사무치는 그리움은 얼마나 갈 수 있는 것일까.  


얼마 전 또 다른 남자 분이 유언장 수정을 상담하러 오셨다. 아내는 이미 사망하신 상태였는데, 예전에 아내가 살아 있을 때 작성한 기존 유언을 수정하고 싶으시단다. 살펴보니 두 딸에게 유산을 반반씩 남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수정하기를 원하는지 여쭤보니, 모든 유산은 새로 만난 여자친구에게 주고, 여자 친구와 함께 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경우에는 여자친구의 딸, 그러니까, 다른 남자의 딸에게 유산을 주겠노라고 하신다.


아마도 새 여자 친구의 요구이리라. 물론 그 부부의 두 딸들이 아빠의 독립을 위해 그리하라고 했을 수도 있고, 이미 두 딸은 자리를 잘 잡아서 유산이 필요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먼저 간 아내가 들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남편과 함께 일군 재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딴 여자 재산이 되어 버리다니... 라고 생각할 듯 하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내가 기댈 곳이 내 남편, 내 아내, 내 이웃 밖에 없으면, 삶을 함께 '했던 '인연보다 삶을 함께 '하는' 인연을 중심으로 내 주위를 꾸려가야 하니까. 오래된 인연이라도 지나간 인연이라면 가치를 두기 어렵고, 짧은 인연이라도 당장을 영위하는 인연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에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고,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어찌보면 캐나다에 사는 한인 1세들은 톨스토이의 통찰에 좀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연이란, 잠자리 날개가 바위에 스치고, 그 바위가 눈꽃처럼 하이얀 가루가 될 즈음 그때서야 한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김현태 시인이 말했다니, 그렇게 보면 모든 인연이 무거운 것이지 짧다고 가벼운 인연이 어디있겠나, 그렇게 생각할 밖에. 


내 나라에서는 인연의 무게를 안고 살았지만, 남의 땅에서는 인연의 현재성에 매달려야 한다. 


그래서 어쩌면, 남의 땅에 서면, 지나간 인연은 모두 가볍다. 


 아쉽지만,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효자, 효녀 키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