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해도 편안한 세상이 주는 여유
우리 사무실에는 멍청한 프린터 2대, 똑똑한 프린터 2대, 영재급 프린터 1대가 있다.
멍청한 프린터는 그냥 시키면 복사한다. 뭘 복사하는지, 종이가 똑바로 놓였는지, 종이 크기는 어떤지 신경쓰지 않는다. 버튼 한 번에 복사 한 번이다. 출력물도 예측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 별로 없다.
영재급 프린터는 까다롭다. 바쁜데 계속 물어본다 - A4지가 올라왔는데, 복사할 종이는 Letter 크기로 할까 Legal 크기로 할까? 신분증이 놓인 것 같은데, 신분증 양면을 한 페이지에 복사할꺼야? 원본이 규격 이외의 크기인데 출력할 종이 크기를 고를래? 원본은 가로로 놓였고 종이 세팅은 세로이니 원본을 다시 놓아 줘. 이 녀석이 묻는 말에 다 답변을 고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해야 비로소 프린팅을 시작하고, 출력물을 하사해 준다. 바쁘니 그냥 출력이나 하라고 암만 말해도 들은 척도 안한다. 출력물도 예상밖인 경우가 많다. 지 마음대로 크기를 조절하고, 농도도 조절한다.
물론 영재급은 스캔도 한 번에 몇 백장씩 해 내고, 기계에 문제가 생겨도 들어오는 팩스를 수백장씩 기억하고 있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출력하는 능력이 있으니 없어서는 안 되는 놈이다. 5 대 중에서 굳이 한 대의 프린터만 남겨야 한다면, 당연히 영재급 프린터 한 대를 보유해야 한다.
하지만, 필요할 때만 똑똑하면 되는데, 쓸데없이 항상 똑똑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비록 그 놈은 들은 체도 안 하지만), 종종 이렇게 말해 준다.
야, 쫌 멍청해도 괜찮아.
한국에서 빡세게 살아오신 분들일수록, 한국에서 영재급 인생을 사신 분들일수록, 캐나다가 한국보다 편하다는 분들이 많다. 부족해 보여도, 멍청해 보여도, 덜 익어 보여도, 서로 눈치 주지 않는 사회. 그냥 한 번 누르면 한 번 출력해 주면 되는 사회. 영재급이 되려고 하면, 야 좀 멍청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회.
그렇게 생각하면, 영재급 프린터가 좀 불쌍하긴하다. 그 놈도 얼마나 피곤할까.
한국에서 KAL 임원을 하시다가 캐나다에서 관광 가이드를 하시면서, 한국에서 삼성 전기 임원을 하시다가 캐나다에서 만두가게를 운영하시면서, 너무 마음이 편안하고 삶에 여유가 생겨서 캐나다 오기를 참 잘 했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평생을 영재급 프린터로 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이 참 큰 복이다, 싶다. 멍청한 프린터로 살아도 영재급 프린터와 같은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참 큰 복이다, 싶다.
야, 오늘도 멍청해도 괜찮아. 아침에 그렇게 나에게 말하고 오늘도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