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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an 16. 2023

다시 폐백으로

절차의 의미, 절차의 힘

드라마 응팔을 보면 친구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말에 진정한 도시 가정이라며 시골 청년들이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랬다. 그 때는 사실 서울에서도 이혼은 흔하지 않았다. 내가 캐나다에 처음 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이혼이 흔하다는 것이었고, 한국과 캐나다의 가장 큰 차이로 손꼽히는 것도 이혼율이었다. 하지만, 이젠 캐나다나 미국 못지 않게 한국의 이혼이 늘었다는 말을 들었다.  


왜 이렇게 급격하게 이혼이 늘었을까. 엉뚱한 생각이겠지만, 나는 제대로된 폐백이 사라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 글 초중반을 보시고 혹시라도 남녀 차별을 떠올리신다면, 절대 그런 내용도 아니고 그럴 의도도 없으니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요즘 폐백은 그저 한복 입고 새댁이 이미 얼굴 다 아는 시부모님과 몇몇 시댁 식구들께 인사하고 예쁘게 기념 사진을 찍는 정도의 자리다. 하지만, 사극에 나오는 폐백을 보면, 그 당시 폐백이 신부에게 얼마나 어려운 자리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자. 평생 믿고 따른 어머니, 아버지는 내게 이젠 출가외인이니 남이라고 한다. 불안한 마음으로 집을 떠나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남편을 만나 혼인을 한다. 혼인 과정도 너무 힘든데 (나는 남자인데도, 그리고 현대식 결혼이었는데고 결혼식 날 힘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다가 쓰러지는 줄 알았다. 전통 혼례를 하던 여자는 더 힘들지 않았을까), 간신히 혼례를 끝내니 이젠 폐백이다. 


시부모님이야 그려러니 하겠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일이 별로 없을 하늘 같은 시댁 윗 분들이 주루루 신부 앞에 모여 앉아 한 마디씩 하신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우리 집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시조이신 xxx 께서는... 말이 덕담이지 사실은 고문이다. 들은 얘기 듣고 또 듣는 것도 다반사였을 것이다. 


폐백을 거치는 새댁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력있는 시댁의 역사를 들으면서 자부심이 생겼을까. 아닐 것이다. 더 긴장되고, 더 불안하고, 더 막막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소리씩 하는 것을 듣는 폐백은 단순히 집안 내력을 설명하거나 덕담을 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부에게 '이제 나는 여기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각인시키는 과정이다. 마음으로부터 이씨를 김씨로 바꾸는 과정이다. 앞 산 나무를 캐어 뒷 산에 심는 과정이다. 


한국 대기업에 입사한 선배, 동기, 후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업은 달라도 공통적인 것이 있었다. 신입사원 교육에서 창업자에 대한 교육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물론 요즘은 다를 수도 있지만, 어떤 선배는 "이 정도면 북한 사람들이 받는다던 수령에 대한 교육과도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밤 9시에 창업자의 회고록을 주고, 다음 날 아침까지 독후감을 써 내라고 하고 채점표까지 주었다는 대기업도 있었다. 


신입 사원 교육을 빙자한 기업 차원의 폐백이다. 어제까지는 그냥 박씨였던 사람을 엘x 박씨, ss 박씨, 대x 박씨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이제 이 신입사원은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나의 이름과 내 집안의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이름을 위해 산다. 


바로 지난 달에 입사를 축하면서 함께 술 먹고 내 앞에서 주정하던 후배 한 놈은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나서 가진 술자리에서 술을 몇 잔 하더니 조금 전까지 자랑스럽게 달고 있던 회사 뱃지를 떼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취한 모습을 보이면 인간 권xx로 취한 거지 ss 직원으로 취한 것이 아니다 - 취한 모습을 보여서 ss의 위상에 금이 가게 할 수 없다. 


제대로 세뇌를 받은 것이고, 신입사원 교육의 효과가 확실하게 먹힌거다. 그렇다, 그게 바로 폐백이다. 


바로 거기에 절차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절차의 힘이다. 


그래서 폐백을 거친 새댁은 퇴로를 잊어버린다. 돌아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세뇌된다. 어제까지는 이씨였고, 지금도 성은 이씨지만, 마음 속에서 오늘부터는 김씨로 살고 김씨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절차, 폐백을 거치니, 신부는 건너온 다리를 스스로 끊어 돌라갈 곳을 없앤다. 돌아갈 곳이 없으니, 이 곳에 뼈를 묻어야하니 어찌되었건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다시 다짐한다 - 돌아가는 길은 없다. 


이제 이런 의미를 가진 폐백이라는 절차가 없으니, 너는 여전히 김씨, 나는 여전히 이씨이고, 수 틀리면 너는 김씨네로, 나는 이씨네로 돌아간다. 쉽다. 아쉬울 것도 없다. 


예전처럼 출가외인을 외칠 시대가 아니니, 결혼을 유지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신부에게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신랑과 신부 모두가 마음 속으로 폐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신랑이든 신부든 갈등을 버텨내고 결혼을 지켜내겠다는 각오를 하는 과정이 결혼식에 빠져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각오가 없다는 것은 늘 퇴로가 있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면서 스스로 퇴로를 막는 각오는 이혼을 줄이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폐백의 효과는 옛 조상들의 낮은 이혼율에서, 그리고 현대의 대기업 신입 사원 교육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하지만, 폐백이라는 절차는 신부에게만 강요할 일도 아니고, 신랑에게만 강요할 일도 아니다. 둘 모두에게 강요되어야 한다. 예전처럼 결혼을 집안과 집안의 일로 보지 않더라도 나는 이제 이 여자에게, 나는 이제 이 남자에게 뼈를 묻는다는 것을 일깨워 줄 절차가 우리네 결혼식에 필요하다. 


신랑과 신부에게 '이제 외나무 다리를 건너고 다리를 불태우는 과정이 결혼식'이라는 각오를 다지게 할 절차가 있다면 이혼율도 다시 떨어지리라. 그것이 폐백이든, 신입사원 교육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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