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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an 14. 2023

옛다, 갱년기 받아라

아빠와 남편에 대한 단상

호르몬을 이유로 잘 못을 덮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조두순 같은 성 범죄자가 호르몬이 잘못이지 자신이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고해서 무죄가 될 수는 없는 일 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 호르몬이 모든 것을 다 덮어주는 것이. 바로 사춘기와 갱년기다. 


사춘기 자녀가 있는 집의 부모들은 논리도, 도리도, 성경도 통하지 않는 절대 강자를 모시고 산다. 사회적으로는 부모가 강자이지만, 실세는 사춘기다. 엄마 아빠로 하여금 해소할 길 없는 분을 삭이고 속앓이를 하다가 결국 홧병을 나게 하는 사춘기는 웬만한 상황은 다 커버하는 핑계 거리가 된다. 


갱년기 아내를 둔 남편은 죄 없이도 매일 자아비판을 한다. 그 동안 회사에사 갈고 닦은 눈치코치로는 갱년기의 준엄한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 회사에서도 충분히 겸손함을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갱년기 앞에 서면 더 낮출 여지가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양의 미덕을 쌓게 된다. 갱년기 역시 갱년기라는 선포 이외에 다른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사춘기 자녀와 갱년기 아내의 파워는 막강하니, 그 시기에 아빠와 남편은 설 곳이 없다. 하지만, 그까이꺼 – 괜찮다. 태권도 1단 단증 정도는 기본으로 보유한 대한민국 남자 아닌가. 사춘기든 갱년기든 받아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춘기와 갱년기가 부딪히는 시기가 생긴다는 거다. 둘 다 공인받은 자격이니 무서울 것이 없다. 사춘기도, 갱년기도, 양보할 이유도 없고 상대를 이해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니 한 쪽이 쓰러져야 끝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춘기도, 갱년기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 결국 쓰러지는 건 아빠고 남편이다. 운이 좋아 남보다 늦게, 혹은 빨리 결혼하고 출산하여 사춘기와 갱년기가 그 집을 따로따로 지나간다면 그 아빠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다. 


예전에 친구 한 명이 사춘기와 갱년기가 부딪히는 이런 상황에서 남편의 역할을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배부른 소리다. 역할은 개뿔, 고래 두 마리가 싸우는 시기에 (운이 나쁜 집은 서너마리 고래가 얽히기도 한다) 남편 새우는 등이 터져도 살아남아 그 시기를 넘기면 승리하는 것이다. 


아빠도, 남편도 호르몬 핑계를 대고 싶지만 그러면 약해보일 뿐이다. 약해보이면 잡아 먹히는 정글에서 나의 호르몬을 변명거리로 쓸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승리자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다. 오늘도 훵해지는 머리 한 가운데를 보면서 살아남았음을, 승리를 자축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승리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나의 갱년기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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