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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Dec 17. 2023

사람은... 투명하다구...

숨겼다고 이긴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첫 직장을 떠나 두 번째 직장에 자리를 잡은 첫 해. Product Manager 들은 연말 보고를 사장님 앞에서 하게 되었다. 발표를 하는 PM 들의 자세는 똑 같았다. 남들도 그랬듯이 나도 그러했다. 


실적은 부풀리고, 실수는 덮고.


뭐, 굳이 변명을 해 보자면, 이제 한국식 겸손의 시대는 지나가고 자기 PR 시대로 접어든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잘 한 일은 끝없이 자랑하고 잘 못한 일은 스스로 나서서 까발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 마치 상식처럼 자리 잡던 때였다. 


발표를 마쳤다. 반응 좋았다. 큰 박수도 나욌다. 돌아가면서 좋은 평가가 이어졌다. 마치 추석 때 덕담을 듣는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 사장님께서 코멘트를 할 차례였고, 나는 당연히 잘했다, 수고했다, 첫 해에 좋은 실적 내었으니 다행이다, 뭐 이런 종류의 말을 기대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천천히 입을 여시더니, 더 처-언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투명하다구..."


대부분이 무슨 말인가 서로 쳐다보는 와중에 나 혼자 가슴이 뜨끔했다. 발표한 내용이 창피해졌다. 조금 전 만 해도 의기양양했는데, 사람은 투명하다는 그 한 마디에 속내를 다 들킨 기분이었고, 혼자 발가벗고 있는 느낌이었다. 


궁금했다. 아니, 내 계략을 사장님은 어떻게 알아챘을까. 그런데, 나중에 더 진급을 해 보고서 알았다. PM의 계략 정도는 사장 눈에는 그냥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사장은 물론이고 임원급들 눈을 속이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사 속일 수 있다고 한들, '내 계략을 사장님이 어떻게 알았는지'를 궁금해 한 내 질문은 잘못된 것이었다. 어치피 사장은 속여도 나는 속이지 못하는 것 아닌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조작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떻게 '보이는 지'에 집중하게 되고,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는 덜 신경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해답'이나 '정답'을 목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사나 관련 부서의 '반응'을 목표로 일하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결국 내 실력을 늘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그래서 그러다 보면, 나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여러 번, 내 선배들을 통해, 그리고 나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숨기고 싶을 때 잘 숨겼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지금을 무사히 넘긴 댓가로 나는 다음 번에 또 숨길 동기를 얻었고, 그래서 그 숨길 동기만큼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잃은 것이니까.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는 숨길 수 없다. 사람은 투명하다는 그 말이 사장과 PM의 관계에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내 주위에는 내 속을 빤히 들여다 보는 사람들이 내가 가는 곳마다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내가 일찌감치 사람은 투명하다는 것을 배운 것은 천운이었다.  


그래서 사장님의 그 말은 한국에서 마케팅을 할 때에도, 캐나다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도 내가 종종 되뇌이는 말이 되었다. 편히 가고 싶을 때, 뭔가 숨기고 싶은 일이 있을 때, 나는 이 말을 떠 올린다. 


사람은... 투명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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