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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an 04. 2024

물구나무서서 술 마시기

너는 뭘 걸 수 있니?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내가 접한 것은 술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언감생심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집안 내력이 술을 마시면 탈이 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터라 술은 살짝 겁이 나는 대상이었지만, 과 선배들과 써클 선배들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25도였던 소주 2병을 라면 그릇에 부어 원샷하는, 일명 사발식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3월에 학기를 시작한 후 3월 말이 되니, 소주 2병 원샷은 그까이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단계가 지나면 훨씬 다양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술을 마시고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주를 2병 마셔도 안 취하는 사람도 빨대로 소주를 마시면 1병도 마시기 전에 취한다는 것도 이 때 배웠다. 맥주를 코로 마시는 신기를 보기도 했고, 속칭 '기도닫고 식도 열기'라는 기술로 맥주를 위장에 들이붓는 (그렇다 - 꿀꺽꿀꺽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욱 들이 붓는 것이었다) 기술도 목도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술과 관련된 사고도 있었고, 1년에 대학 신입생 중 1명은 꼭 술 마시다가 사망한다는 보도 기사나, 한국만 유난히 대학 신입생들에게 이상한 술 문화를 가르친다는 비판 기사도 매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국적 기업에서 일을 해 보니, 꼭 한국만 대학 신입생에게 이상한 술 마시기를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 첫 번 독일인 상사 (마케팅 이사)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공학과 출신이었다고 했다. 그 학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과 신입생 환영회에는 독특한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물구나무를 서서 맥주 500cc 를 원샷해야 한다는 거다.


아니, 그게 가능해?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설마 서양 애들도 선배가 시키면 마신다고? 하는 생각이 따라 왔다. 그런데, 독일도 한국과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 선배가 시키면 해야 한다고 했다. 선후배 간의 규율도 있고, 또 그걸 떠나서 동기들은 다 물구나무 서서 맥주를 마시는데 혼자 해 내지 못하면 창피한 생각이 든다고.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환영회 자리에서 이 양반이 시범을 보여준다. 사장, 부사장, 직원들 다 있는 자리에서 마케팅 이사라는 사람이 벽을 향해 물구나무를 서더니 (발은 양쪽에서 두 사람이 잡아 주고 - 물구나무도 팔로 서는 것이 아니라 목으로 버텨야 한다) 맥주 한 잔을 집어들고는 쭈욱 비운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박수치고 집에 와서 나도 해 본다. 일단은 소주 잔에 물을 채워 벽 근처에 놓고, 방바닥을 박차고 벽에 다리를 대어 물구나무를 선다. 아내에게 발을 잡아 달라고 하고는 세 번만에 겨우 성공한다. 힘껏 버티면서 손을 뻗어 소주 잔을 집어든다. 그제서야 손 없이 목으로만 물구나무를 버티기는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목이 좀 길다). 이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잔을 입에 가져오는데, 정확하게 입으로 가져오는 것도 만만치 않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입술에 잔이 닿았다. 거꾸로 술이 들어갈까 의심하면서 마셔본다. 


어, 된다!


물구나무를 서서 마셔도 물은 위장으로 잘 흘러갔다. 다만 숨을 쉬면 안 된다. 숨 참고 마셔야 한다. 이젠 소주로 해 본다. 이것도 된다! 나는 원래 콜라든 맥주든 기포성 술은 원샷을 못하니 맥주는 시도해 보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도 물구나무로 뭔가를 마실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님, 부사장님과 함께 일본 회사의 방문객들을 만났다. 사장과 부사장이 함께 회의에 나왔다는 건 그 날 회동이 중요한 건이라는 뜻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갔다. 그 때만 해도 고급 식당은 좌식이 많았고, 그 날도 저녁은 좌식 고기집이었다.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에, 사장님께서 일본 회사 대표에게 제한하셨다. 


"물구나무 서서 한 잔씩 할까요? 어떻게 하는지 제가 보여드리지요"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이게 무슨 말인가. 양측 회사 대표들이 모인 나름 격식 차린 자리에서, 대학교 신입생들이 한다는 물구나무 술먹기라니. 아니, 그걸 떠나서 이 양반 그걸 하실 수 있기는 한 건가. 나는 사장님이 농담을 하신 건가 했다. 일본 고객들도 농담이리라 생각했는지, 반신반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나와 부사장님께 다리를 잡아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물구나무를 서셨고 (다행히 목이 짧은 분이었다). 그리고 내게 소주 한 잔을 달라고 하시더니, 원 샷하셨다. 


집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해 본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양반, 집에서 연습했네!"


목으로 버티는 물구나무, 그리고 거꾸로 서서 술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모양새 등이 분명 연습한 거였다. 아니, 왜? 나야 재미로 그랬지만, 환갑 넘어 은퇴를 앞둔 양반이 그걸 재미로 했을 리는 없는데. 


그런데, 이어서 부사장님에게 잔을 건네는 사장님. 부사장님도 선뜻 일어나 벽으로 가셨다. 나와 사장님이 다리를 잡고 (이 분도 목이 짧으셨다), 부사장님도 원 샷 성공. 나는 그 때 또 알았다.


" 이 양반도 집에서 연습했네!"


그리고, 염려했던 대로 이번에는 부사장님이 내게 잔을 주신다. 아, 미리 말을 해 주셨으면, 한 번이 아니라 몇 번 더 연습하고 올 껄.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한 번 한 거, 두 번은 못 하랴. 부들부들 떨면서 성공! 부사장님이 한 말씀 하신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목에 힘이 없어"


아니, 두 분이 목이 짦은 건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참고 웃었다. 나름 쇼는 했으니 이제 술자리가 이어지려나, 했다. 


그런데, 일본 회사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으로 갔다. 설마... 아니겠지... 하는 사이에 그 분도 물구나무를 섰고, 두 사람이 다리를 잡았고, 소주 잔을 위험하게 입술로 가져가더니, 마셨다. 


와, 저걸 연습 없이 해 내네. 나는 박수를 쳤다. 뒤를 이어, 일본 회사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따라서 시도했고, 우리만큼 편안하게는 아니지만, 한 명 빼고는 소주 한 잔씩 마시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이나 실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해 졌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일본인들이 물구나무를 설 줄은 몰랐다.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나중에 사장님, 부사장님과 2차를 가서 그 사람들이 물구나무 설 줄은 몰랐다고 말씀드리니,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아직 비즈니스를 잘 몰라서 그래"


모르는 건 아니다. 나도 예전에 들은 말은 있었다. 사원은 종이칼로 싸우는 사람들이라 지더라도 종이에 베이는 정도이지만, 관리자는 나무칼로 싸우는 사람들이라 지면 크게 다치고, 사장단은 진검 승부를 하는 사람들이라 지면 목숨 내 놓아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비즈니스는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거라고. 


물구나무 서서 술 마시는 행위 자체는, 그저 어린 대학생들의 치기어린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치기어린 행동들도 어느 상황에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라,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종이칼이나 나무칼이나 진검이 될 수 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나름 중간 관리자였는데도, 종이칼로 싸우던 것이었고, 그래서 일본 고객들이 물구나무 설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진검으로 싸우던 사장님은 그 상황에서 상대방이 물구나무를 설 수 밖에 없음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 날 이후,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목숨까지는 아니지만 팔 하나 정도는 걸어야 한다는 자각을 했던 듯 하다. 아마도 그 때의 그 자각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팔 하나 정도 걸어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사무실을 열 용기는 평생 내지 못했을 지도 모르고, 개업하고 경험했던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에 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막상 내가 작은 사무실을 개업을 하고 보니 진검으로 싸운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기 사업을 하고 싶은 직장인이라면, 종이칼 들어도 되는 때에 나무칼이라도 드는 각오로, 팔 하나 정도는 걸 각오로, 그렇게 직장인 생활을 해 봐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고, "저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자문을 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뭘 거실 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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