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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Dec 27. 2023

[휴양지에서의 단상 (1)] 쉰다는 것

12년만에 3번째 휴가를 가졌다

내가 로펌을 나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을 때, 사실 두려움이 있었다.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내가 해 본 역할은 학생이나 월급쟁이가 전부였다. 학생 시절에는 내가 돈을 내고 다니는 것이니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월급쟁이 시절에는 어쨌거나 정해진 월급은 나오는 생활이니 회사가 잘 돌아가든 아니든 내 부담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밥벌이를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나, 두렵지 않을 재간이 없지 않은가. 


주위의 한인 사업자 분들께 자문을 구했다. 변호사 뿐이 아니라, 편의점 사장님, 세탁소 사장님, 컴퓨터 수리점 사장님... 가지리 않고 자영업의 장단점을 묻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안감을 잠재울 요소가 필요했었나보다. 


참 많이도 여쭤보았는데, 결국은 공통적인 서너가지로 압축이 되었고, 그 중 하나가 이거였다. 


"사업 시작하고 첫 5년은 쉴 생각을 말아야 해"


그 시기가 사업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란다. 그까이꺼 -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회사 생활을 할 때도 휴가를 간 적이 거의 없었다. 신혼 여행 중에도 여러 날, 여러 차례 업무 회의를 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워커홀릭에 가까운 나날이었고, 캐나다 로펌 생활을 하면서도 휴가를 낸 적은 없었다. 그저 빨간 날을 이용해 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5년 정도 더 쉬지 않는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나, 싶었다. 


6시 이전에 사무실에 나와서 11시 넘어 사무실을 나가는 생활을 꽤 오래 했다. 선배 변호사 분들이 그러다가 갑자기 burn-out 되어서 다 때려치우고 은퇴하게 되니 조심하라고 하실 정도로 일에 집중했고,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자리도 잡았다. 


그런데, 올해 언제인가 갑자기 휴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다가 꿈의 휴양지라는 멕시코 칸쿤의 all inclusive 리조트에 가 보기로 했다. 가족 여행을 계획했으나, 아들은 고사하고 (엄마, 아빠 없는 집에서 친구들 불러 노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딸은 가고 싶어 했으나 친구와 프랑스 여행을 계획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빠지게 되어 아내와 둘만 가는 여행이 되었다. 변호사 된 지 12년 만에 3번째 휴가다. 


8박을 잡았으니, 짦은 일정은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캐나다의 다른 커플은 4박 5일의 일정으로 와서 관광을 3일 하고, 리조트에서 주관하는 각종 야간 파티 (데낄라 파티 등)에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만족스러웠단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8박 내내 바닷가에만 앉아 있었다. 일을 안 할 수는 없으니 하루에 2-3시간씩 일을 하기는 했지만, 일하지 않고 잠 자지 않는 시간에는 바닷가에 있는 썬베드에서 바다만 바라보다가, 또 책 보다가, 그러기만 반복했다. 


그래서 아침 어두컴컴한 수평선에는 항상 구름이 빼곡하다는 것을 알았고, 카리브해의 일출이나 동해의 일출이나 별 차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 펠리컨이 고기 잡을 때에도 다른 새들처럼 바닷속으로 급강하한다는 것도 알았고, 바닷 바람이 춥지 않고 포근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예전 같으면 참 돈 아깝고, 시간 아깝다고 생각했을 법 한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참 잘 쉬다 왔다, 싶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내 마음에 쉼을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쉬지 않으면 멈추게 된다는 말이 있다. 


위커홀릭에 가깝던 내가, 휴가마다 여기저기 관광하기 바빴던 내가 (그리고 아내가), 많이 보는 것에서 쉼을 얻었던 나와 아내가, 어떻게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해변에 앉아만 있다가 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와 아내는 강제로 멈춰지기 작전까지 갔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쉰다는 것의 의미는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구나. 나는 그 동안 작게, 자주, 조금씩 쉬는 것으로 쉼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큰 쉼이 필요했었나 보구나. 작은 쉼은 많이 모아도 큰 쉼이 되지는 못하나 보구나. 


그러니, 이제 가끔씩은 이렇게 큰 쉼을 가져 주어야 하겠다.  쉼표로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마침표도 찍어 줘야 하겠다. 마침표 한 번 찍는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벌써부터 내년 휴가 계획에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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