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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an 22. 2024

경험에도 인플레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세요?

캐나다에서 로스쿨을 다니면서 내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했던 것은 역시 학점이었다. 그런데, 그냥 학점을 잘 받아야 하는데 학점이 안 나와서 고민하는 것 보다는, 학점을 상대평가로 매기고 또 정규분포로 준다는 것이 더 큰 부담이었다. 


내가 다니던 로스쿨의 학점은 철저하게 상대평가이다보니,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남이 더 잘하면 학점이 나쁘게 나온다. 게다가 학점의 정규분포를 맞추다보니, A 가 있는 비중만큼 C 나 D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한국에서 문제가 되어온 학점 인플레가 로스쿨에는 없었다. 


아니, 다른 로스쿨에서는 학점을 잘 주면 우리 로스쿨 학생들만 손해 아니야? 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로스쿨 학생들은 만나보니, 적어도 온타리오 주의 모든 로스쿨은 철저하에 상대평가, 정규분포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듯 했다. 


마음은 불편하지만, 그러다보니, 학점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학점 인플레가 만연한 곳에서는 사실 학점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학점 뿐이랴. 경험에도 인플레가 있다.  


인플레는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며칠 전, 어느 고객과 창업 상담을 했다. 내가 어느 자선 바자에 경매 물품으로 내 놓은 "1시간 법률 상담" 쿠폰을 낙찰 받으신 분이었다. 


낙찰 금액이 내게 오는 건 아니지만, 고마운 고객 아닌가. 그래서 약 2시간 동안 법률적인, 그리고 비 법률적인 여러가지 분야에서 자문을 해 드렸다. 지금은 변호사 일이 주 업무이지만, 한국에서는 Product Manager, Portfolio Manager, Strategic Marketing Manager 등 나름 마케팅이나 경영 관련 일도 꽤 깊이 다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의 자문을 드렸다.


그런데, 자문 후에 이 분이 나와 사진을 찍으시고 싶으시단다 - 변호사 사무실처럼 보이는 배경으로. 그런 일은 처음이라 왜 그러시는지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법률 상담 쿠폰을 경매에서 낙찰받고, 변호사와 자문을 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본인의 SNS에 올리시기 위함이라고 했다. 일종의 홍보라고. 그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분은 본인의 경험을 스토리로 만들어 올릴 줄 아는 분이구나.


그렇게 스토리가 되는 SNS 포스팅은 아마도 그 분 사업의 자산이 될 듯하다. 그런데, 같은 SNS 사진이라도 이렇게 자산이 되지는 않는 것들도 있다. 그저 과시용으로 게시하는 고가품 사진이나 고가의 음식 사진들이 그렇다.  파인다이닝이니 오마카세니, 호캉스니 여러가지 이름의 과시형 사진이 SNS를 메운다. 


돈이 많아서 그러는 거라면 모르지만, 분명 벌이에 비해 과하다고 지적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왜 그럴까 하고 조사해 보니 이런 대답이 많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런 것도 한 번 경험을 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언뜻 일리가 있는 듯도 하다. 고가품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그리고 가치관이, 있는 듯 하고, 그것도 분명 경험은 경험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답을 하시는 분들은 두 가지의 다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신 듯 하다. 


내 생각을 변화시키고 나를 계발하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래서 나의 자산이 되는 경험이 있는가 하면, 한 번 경험 후에는 내게서 사라져버리고 그 경험을 나눌수록 경험의 인플레만 부추기는, 그런 경험도 있다. 전자는 나의 내공으로 쌓이고, 후자는 나의 시간과 돈만을 빼앗아간다.


과시형 SNS 포스팅은 내 생각에 후자다. 나만 그런 생각을 것일까 생각해 보니, 다른 분도 비슷한 영상을 올리신 것이 있었다. 


https://www.gainge.com/contents/videos/2932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과시형 포스팅이 많아지면, 경험의 인플레를 부추기고, 그러면 그들의 경험을 나도 경험해 보기 위해, 다시 과시형 소비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2023년은 인플레가 세계적인 화두였다. 인플레로 인해서 매일매일의 삶이 빡빡해 졌다는 고객이 여기 저기서 넘쳐나고, 이자율도 인플레를 반영하는 탓에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을 날리신 고객들도 있다. 


인플레를 좋아하는 사람은, 인플레를 틈타 가치가 오르는 물건을 보유한 자산가들 뿐이다. 경험의 인플레로 가치가 올라갈 자산을 우리는 가졌는가? 혹시 그런 자산이 없는데도 경험의 인플레를 즐기고 있는 거라면, 언젠가 고이자에 집을 날리듯, 경험의 인플레에 내가 가진 것을 날리는 날이 오지는 않을지. 


그것이 걱정된다면, 해답은 있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경험에 이미 인플레가 많이 붙은 이 시점에서, 과시형 경험은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한다. 마치 인플레 붙은 학점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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