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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an 06. 2023

선생님, 애무가 뭐예요?

초보가 왕초보를 가르치는 시대라지만

나는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생부터 선생님까지 학교에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캐나다에서 남녀공학만 다닌 우리 아들이 보기에는 삭막한 곳이었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 땀이 뻘뻘 나는 수업 시간에 삭막한 남고에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날 리 없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한테 애매한 질문하는 학생들이 있다. 선생님 첫 사랑 얘기 해 주세요, 선생님 뽀뽀 해 보셨어요? 선생님 애인 있으세요?

 

늘상 겪으시는 일이니 적당히들 넘어가신다. 그런데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의 국어 수업 시간에 친구 한 놈이 도발을 했다. 

선생님, 애무가 뭐예요? 


다들 박장대소를 하는데, 선생님께서 몸을 돌리시더니 교과서를 덮으라고 하신다. 순간 다들 긴장했다. 아, 선을 넘었구나. 작년에 1년 선배들에게 여름 방학 숙제로 천자문을 100번씩 쓰라고 하고,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회초리 100대씩을 실제로 하사하셔서 악마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신 우리 담임 선생님, 아, 죽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문선 전집을 외우고 다니신다는 소문이 있던 우리의 인간 박태성 선생님, 애무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하신다. 분위기 반전 - 와!!! 이게 웬 횡재야. 다들 신이 났다. 수업을 안 하는 것도 좋은데, 애무에 대해 제대로 알려준다니. 


하지만, 공책을 펴라고 하신 선생님은 칠판을 다 지우시고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한자로 채우기 시작하신다. 베껴 적으란다. 여기 저기서 불평이 나온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니들, 애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지 않아?” 


도대체 어떤 고등학교 남학생이 이 유혹을 견딜 수 있다는 말인가. 오로지 애무에 대한 궁금증 하나로 다들 지루함을 참고 적고 또 적는다. 모르는 한자가 너무 많아 다들 거의 그림 수준이다. 선생님은 그 긴 글을 그냥 머리에 넣고 계셨다. 


칠판을 빼곡하게 다 채우시더니, 이제는 해석을 시작하신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도연명의 귀거래사였다. 날도 더운데 한시라니. 더위가 더 덥게 느껴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님은 열심히 해석을 이어가신다. 지루하기 그지 없었지만, 언제 애무에 대한 얘기가 나올지 몰라 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칠판 뒷 부분에 쓰인 어느 한 구절의 한자들과 문구에 대한 설명까지 마치시고 말씀하셨다 - "이 '무'자가 바로 애무라고 말할 때의 그 '무' 자다. 쓰더라도 어디서 온 말인지는 알고 써라. 이제 너희가 쓰는 애무라는 말은 옆 xx 고등학생들이 쓰는 그 애무와는 다를 것이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일진 한 놈마저 그 '무'라는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과였으나, 순간적으로 국문과 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잠깐 들었더랬다. 


어느 성공한 젊은 부자가 말하기를 요즘은 전문가가 초보를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라, 초보가 왕초보를 가르치는 시대라고 했다. 왕초보만 벗어나서 초보가 되면 배움을 기다리는 왕초보들이 많으니 그로부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묻는다 - 부자가 되고 싶다면 당신은 삼성 회장이 발표하는 세미나를 가야겠느냐, 아니면 경매로 부자가 된 옆 집 아주머니가 발표하는 세미나를 가야겠느냐. 


동의한다. 그런 시대다. 삼성 회장 보다는 옆 집 아주머니가 나를 더 빨리 부자로 만들어 줄 지는 모른다. 하지만, 삼성 회장이 더 큰 부에 다다르는 길을 알려 줄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시대라서 더더욱 초보를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닐까. 


초보로도 충분하다는 유혹은 뿌리치기 어렵다. 일단 쉬운 길이고, 해 볼만한 길이다. 하지만, 초보를 지향하는 30대, 40대는 환갑이 되어도 초보일테다. 널린 것이 초보이고 늘어나는 것이 초보이니, 그 곳에 머무르면 계속 나의 가치를 낮추어야만 팔리는 상황을 마주치게 될 것이다. 가치를 높이려면 초보의 대열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부자가 되는 방법에서도, 자기 계발에서도, 초보들의 왕초보 가르치기가 한창이다. 본인의 전문이 아닌 분야에서 알아낸 것들을 이야기하기 바쁘다. 물론 다 좋은 resource다. 내가 왕초보라면 초보에게 당연히 머리 숙여 배울 일이다. 


그러나, 나의 배움은 초보에게서 올 지라도, 나의 지향점은 초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애무를 물어볼 때에 야한 동영상을 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넘쳐난다. 하지만,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어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지금에 머무르고 싶어질 때마다, 현재에 머무르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선생님이 적어 주신 그 구절, 무고송이반환 (撫孤松而盤桓)을 떠올리고 힘을 낸다. 물론 이제는 성인이니 애무도 생각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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