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정리했으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로스쿨 1학년 1학기에 Tort라는 과목의 중간 고사를 보았다. 예전에 설명했다시피, 이 중간고사는 실제 학점과는 관련이 없었다.
다만, 로스쿨 1학년생 중에는 로스쿨 시험을 치러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로스쿨 시험은 대학에서 보던 시험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기말 고사를 잘 대비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 1학년 1학기에 한 과목을 골라 연습삼아 중간 고사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 결과에 대해 1:1로 피드백을 주는 방식으로 로스쿨 시험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데에 이 중간고사의 목적이 있었다. 이 중간 고사 성적은 최종 성적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물론 이 제도는 Osgoode Hall Law School의 경우이고 다른 Law School들은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이 중간 고사에서 내가 범한 가장 큰 실수는 정답을 찾으려는 데에 있었음을 이미 설명했는데, 그에 못지 않은 다른 실수도 하나 있었다.
바로 모든 판례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본 것이다.
나는 중간 고사를 위해 그 때까지 배운 모든 판례를 정리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해서 딱 한 장의 도표로 만들었었다. 캐나다는 한국과 같이 모든 법을 법제화 하는 것을 추구하는 성문법이 아니라, 법원의 판결이 곧 법이 되는 불문법 시스템이기 때문에 법원의 판결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스쿨 시험은 거의 다 open book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험이 open book 이라고 해도 책을 찾아가면서 답안을 작성할 시간은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만의 정리 노트가 있다. 나는 그 노트도 줄이고 줄리고 또 줄여서 손으로 딱 한 장의 도표를 만든 것이었다. 내가 보아도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도표에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져 있었고, 그래서 사실 그 도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시험을 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전공한 이과 학문들은 모든 원리가 동일한 중요성을 가졌다. 광합성 (Photosynthesis)이 해당과정 (Glycolysis) 보다 우선하는 것도 하니고, 호흡 (respiration)이 발효 (fermentation)보다 옳은 답도 아니다. 모든 원리가 함께 작용하고,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은 그렇지 않다. 하급 법원의 판례가 수백가지가 있어도, 상급 법원의 판결 하나의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마치 동메달 100개를 따도 금메달 1개를 딴 국가를 순위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판결은 다 같은 판결이지만, 그 중요도는 현격하게 다르다.
그렇기에 그 도표에는 그저 '모든' 판례와 그 연관성을 정리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에 대해서 대법원이 말한 것이 있는지, 고등법원이 말한 것이 있는지, 지방법원이 말한 것이 있는지를 따져가며 정리를 했어야 했다. 상급 법원의 판결이 중요하다는 건, 캐나다의 법제 시스템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기초인데, 시간에 쫓기면서 정리를 하다가 그걸 잊었다.
나중에 교수님이 샘플로 주신 두 가지 A+ 답안과 비교해 보니 내가 훨씬 많은 판례를 언급하기는 했다. 암기의 힘이고 정리의 힘이다. 하지만, 나는 상급 법원의 결정이 있는데도 다수의 하급 법원의 판례를 들어가면서 상급 법원의 결정에 반하는 결론을 유출해 내고 있었다. 그 때 내 머릿 속에 떠오른 단어는 이거였다.
헛수고.
딱 그거였다. 잠도 내가 덜 잤고, 생각도 내가 더 많이 했고, 자료 준비에 시간도 내가 더 많이 썼을 것이 확실한데, 기초를 잘 못 놓았더니 헛수고가 되었다. 분명 내가 쌓은 탑이 더 높았고, 더 공든 탑이었으나, 궁 안에 성을 쌓으라는 지시를 받고 논 한 가운데에 탑을 높이 쌓은 꼴이 되었다.
그렇게 로스쿨 첫 시험에서 세게 한 대 얻어 맞은 덕에, 나는 영화 '곡성'에 나온 그 유명한 대사에 바로 공감할 수 있었다.
"뭣이 중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