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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에 줄 긋는 이유

따뜻한 아메바로 충분하다

by 신광훈

캐나다에서 캐롤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는 좀 되었다. 처음 캐나다에 발을 디뎠던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고, 11월 부터 거리에는 온통 캐롤이 울려 퍼지고 골목마마 크리스마스 트리와 전등 장식이 넘쳐났었는데, 점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사라지더니 2024년에는 신경쓰지 않으면 지금이 크리스마스 때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인사를 하면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건네는 손길이 드물게 있고, 그 중에는 한 번 더 내 생각을 붙잡는 글귀도 종종 보인다. 이번에도 그런 카드를 한 장 받았다.


"가는 세월에 줄 그어 어제와 오늘을 구분짓는 게 무슨 의미인가 했었는데, 고마운 분에게 "올 한 해 감사드립니다" 마음 전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가는 세월에 줄을 긋는 이유를 참 따뜻하게 풀었다.


이 분은 이렇게 선 긋는 이유를 해석하시는데, 나는 가는 세월에 왜 줄을 그을까 -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산다 말하면서도 열심히 날과 달과 해를 구분하는 대열에 끼려고 하는 건 왜일까.


굳이 이유를 끄집어 내어 본다면, 아마도 나는 아메바가 되지 않기 위해, 좀 더 고등한 생물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올해와 내년을 열심히 선 그어 구별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메바는 단세포 생물 중에서는 꽤 큰 크기를 자랑하는 놈이다. 미생물로 분류되지만 육안으로 관찰이 가능할 정도의 크기이니, 하나의 세포로서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크기이다. 하지만, 격투기 시합이라면 모를까, 생물의 세계에서는 꼭 체급이 큰 것이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니다. 보통 단세포 생물들이 "미개"하고 "원시"적인 생물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은 다세포 동물이라 30조개가 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또 세포 수가 많아고 저절로 고등생물이 되는 건 아니다. 고등 생물이 되려면 세포간의 연결이 중요하다.


일단 세포를 잘게 나눈 후에는, 서로 다른 세포 사이에서 정보를 주고 받고 물질을 주고 받으면서, 역할도 서로 분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세포가 나뉘어진 의미가 있고, 그렇게 나뉘어진 세포를 연결할 수 있다면 다세포 생물이 단세포 보다 유리하고 "고등"하다.


그래서 고등해지기 위한 키워드는 "나뉨"과 "연결"이다. 다시 연결할 것을 굳이 왜 나눌까 싶지만, 나누고서 다시 연결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이 고등화의 첫 단계이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그러니 연결이 될 수 있다면, 열심히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한 발 더 나아가고 싶어서 어제와 오늘을 나누고, 지난 해와 새해를 나누나보다.


그런데, 그런 나눔이 의미가 있으려면 새해를 지난 해와 연결시켜야 하고, 또 그렇게 지나갈 새해를 다가올 새로운 해와 연결시켜야 하는데, 그 일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열심히 나누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이라도 더 열심히 지나간 것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붙잡아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다리를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연결된 시간이라라 선 긋는 의미가 살아날텐데. 캐롤이 사라지고, 크리스마스가 잊혀져 가는 지금, 다 같이 긋던 그 줄이 희미해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열심히 줄을 긋고 그어진 줄 사이의 날과 달과 해를 연결하는 것이려나.


그렇게 또 더 바쁘게 살 궁리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등해 지지 않으면 어떠냐고 말하는 따뜻한 핑계를 받지 않았는가. 이렇게 날과 달과 해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혹 앞으로 더 나아가는 길이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내 안의 따뜻함을 전할 수단으로 좋다고 말하는 카드를 받지 않았는가.


그저 그렇게 따뜻하게 기억되는 크리스마스면 그로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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