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은퇴했더라구

난 70 넘어도 일 할거야

by 신광훈

"조기 은퇴 계획을 짜고 있어요. 40대 중반까지만 일하고, 그 다음엔 passive income 을 받으면서 정말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어요."


한국에서 캐나다로 건너온 젊은 청년들 mentoring 을 해 주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미 30-40대 직장인들 사이에서 '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운동이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고 한다. 빠듯한 월급, 이어지는 야근, 불투명한 미래. 이런 현실 앞에서 "일로부터의 해방"은 매력적인 꿈처럼 들린다.


문제는 '일을 그만두는 것' 자체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한 채 은퇴를 꿈꾼다는 점이다. 모두가 은퇴를 꿈꾸는 이 시기에 나는 묻고 싶다.


더 이상 일하지 않을 때, 우리는 누구인가?

아내를 위해 한국에서의 경력을 모두 포기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아내 학업 뒷바라지만 해 왔는데, 캐나다에서 성공적으로 직장을 잡은 아내가 변심을 해서 이혼을 당한 (?) 친구가 있다. 갑자기 오갈 곳도 수입도 없게 된 그 친구는 캐나다의 전문 직업 학교에서 회계를 배웠고,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신입 사원으로 어느 작은 회사에 가까스로 취직을 했다.


어떻게 지내나 하고 오래간만에 만나 본 그 친구는 예상보다 밝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준다.


“얼마전에 한국에 다녀 왔는데, 내 친구들이 싹 다 은퇴를 했더라구. 깜짝 놀랐어”


그리고는 다짐하듯이 말했다.


“나는 적어도 70까지는 일 하려고”


아내에게 배신(?) 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 친구를 어둡지 않게 지탱해 준 것은 그의 일이었다. 사회적 소속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효용 가치를 확인했기에 그는 환갑이 다 된 신입사원 딱지를 달고도 밝았다. 그는 이제 일의 가치를 알았다.


직장에 목을 매자는 뜻은 아니다. 그 친구도 그렇지만 우리는 직장-인(職場-人)으로 살아왔다. 회사원, 팀장, 대리, 과장. 명함에 적힌 직함이 곧 정체성이고, 명함이 사라지고 호칭이 사라지면 나도 함께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들. 그것이 일반적인 직장-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바라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직-장인(職-匠人)이 되자고 후배들에게 설파하곤 했다. 직업을 가진 장인 말이다. 직장에 매이지 않아도 자신의 일이 있는 사람. 내가 원하는 것이 회사에 있다면 회사에 몸을 담아도 좋지만 회사원이라는 자리가 필수는 아닌 사람. 명함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내가 말하는 직-장인이다. 하지만, 그건 일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조기 은퇴를 꿈꾸는 이유 중 하나는 직장이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나에게 미안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럼 나도 회사에 미안해 할 필요 없다"며 최소한의 에너지만 현 직장에 쏟고 빨리 은퇴하려 한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직장-인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직-장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은퇴 준비'를 검색하면 대부분의 결과는 '노후 자금'으로 귀결된다. 몇 억이 필요하고, 어떤 연금 상품이 유리하고,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 넘쳐난다.


물론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 주위에는 충분한 자산을 모아 은퇴했지만, 골프와 여행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 몇 달은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본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에만 매몰된 은퇴 계획이다. 숫자만 바라보다 보면, "내가 앞으로 20-4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자율과 수익률에 시선이 고정되는 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뒷전으로 밀린다.


조기 은퇴를 꿈꾼다면 우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회사가 없어도, 월급이 없어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만약 은퇴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직장-인으로써의 도피일 뿐이다. 직-장인의 핵심은 회사가 아니라 '일' 그 자체에 있다.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 내가 가치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 회사라는 울타리가 없어져도, 월급이라는 보상이 없어져도,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고 누군가에게 가치를 주는 사람.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지 않는가. 직장이라는 울타리 없이도 나는 여전히 직-장인으로 살 수 있다. 그것이 직책 없이도 여전히 나로 존재하는 방법이다. 은퇴 이후는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진짜 직-장인으로 완성되어 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결국 진짜 은퇴 준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직장이 없을 때도, 나는 여전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 있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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