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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Feb 15. 2023

계란 흰자의 힘

지금, 버퍼가 필요합니까?

나는 진이나 보드카를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을 좋아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은 White Lady다. 이름이 여성스러워 남자가 주문하기엔 좀... 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제대로만 만들면 딱 내 취향이다. 


예전에 조선호텔 바텐더를 그만두신 연세있는 할아버지(?) 사장님께서 내가 일하던 신사동에 칵테일 바를 여셨었다. 아직 칵테일이 그다지 흔하지 않았고 인기가 있던 때도 아니지만, 그 가게의 분위기에 취해서 나는 곧 단골이 되었고, 소수의 친구나 선후배와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그 가게를 찾았다. 


처음에 내가 늘 마시던 것은 마티니. 마티니가 칵테일의 제왕이라고 하지 않는가. 맛이 아니라 분위기로 가는 곳이니 그냥 마티니만 시켰고, 사실 그 전에 마셔본 칵테일도 마티니와 맨하탄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 가게를 가지 전까지는 마티니가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맨하탄보다는 나았지만, 도대체 왜 이런 맛이 칵테일의 제왕인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사장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마티니를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왜 마티니가 칵테일의 제왕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동안 내가 마신 마티니는 재료는 다 들어갔을지 몰라도 비율이 맞지 않았거나, 좋은 맛을 낼 재료 (술)를 쓰지 않았던 거라고 하셨다.  


그 맛에 반해 또 계속 마티니만 마시던 어느 날, 혹시 추천을 해 주실 칵테일이 있느냐고 여쭤보았더니, 내게 잘 맛을 것 같다며 고민없이 바로 3-4가지를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추천을 해 주신 칵테일을 마셔 보았는데,  다 좋았으나, 그 중 나를 확 사로잡은 것이 바로 White Lady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교보문고에 가서 칵테일 책을 찾아 White Lady 만드는 법을 찾아보니 만들기가 복잡한 술은 아니었다. 진, 트리플섹 그리고 레몬쥬스. 이렇게 3가지만 있으면 된다. 


4번째 재료인 계란 흰자는 거품을 원하면 넣는 정도라고. 하지만, 계란 흰자를 생으로 넣으면 맛이 탁해질 것 같아서 넣지 않았다. 내가 진을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을 좋아하는 이유가 깨끗함인데, 계란 흰자라니. 그 바텐더 사장님께서도 계란 흰자를 넣지는 않으셨다. 


그러니 3가지 재료만 용량 맞춰 잘 섞으면 된다. 이 정도라면야,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남대문에서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만들어 보았는데, 정말 오랫동안 수십번을 만들어 보아도 만족스러운 맛이 나온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그럴까. 고민하고 고민해도, 사장님께 여쭤 보아도, 실패율은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요리하고 남은 계란 흰자가 있어 그냥 한 번 넣어 보았는데, 어! 맛있다. 


생각이 많아진다. 계란 흰자가 비법이었던 건가? 아닌데, 사장님은 넣지 않으시는데. 그래서 다시 책을 찾아보고 또 찾아 본다. 대체 왜? 사장님은 계란 흰자를 안 써도 맛이 나는데, 나는 넣어야 맛이 나는 걸까? 


알고보니 계란 흰자 없이 제대로 된 맛을 맞추기는 어려운 것이 White Lady였다. 계란 흰자는 거품을 내는 역할도 하지만, 넣으면 맛에 대한 일종의 buffer (완충제) 역할을 해서 초보가 만들어도 맛을 내기가 쉽단다. 재료만 적당히 맛추면 쓸만한 맛이 나오게 해주는 역할도 흰자의 몫이었다.


계란 흰자 없이 항상 일정한 맛을 내려면 아주 정확한 계량이 (과장하면 술을 방울 단위로 계량하는 것이) 필요했다. 계란 흰자가 들어가면 계량이 좀 흔들려도 일정한 맛 (그리고 좋은 맛)을 내기가 쉬운거다.


아 그렇구나. 유레카였다. 금방 유혹이 생긴다. 흰자를 넣으면 되겠네 - 맛없는 칵테일을 마시기는 싫잖아. 맛으로 마시는 건데. 


하지만, 생각 끝에 나는 계란 흰자를 거부하기로 했다. 


버퍼의 유혹은 크고 깊다. 작은 노력으로 큰 것을 얻게 해 주고, 잘못된 노력도 덮어주어 올바르게 보이는 결과를 제공해 주니까.


그러니까, 버퍼를 쓰면 자신감도, 만족도도 높아지고, 당연히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하지만, 버퍼는 정면 돌파를 피하게 한다. 적당히 해도 된다는 생각을 심는다. 이만하면 됐다고 느끼게 한다. 앞으로 더 나아갈 의미를 잃게 한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고 운동 선수들이 많이 말한다는데, 버퍼는 연습에서는 독이다. 실력이 늘 리가 없다. 마약과 다를 바가 없다. 칵테일을 만들면서 버퍼에 기대면, 다른 일을 해도 그렇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과감히 계란 흰자를 거부했다. 3가지 재료로만 맛을 내 보리라.


아쉽지만, 그래서 오늘도 나의 White Lady는 맛이 없다. 아직은, 아직은 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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