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호의와 방패가 있는 히어로 둘리가 되었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배우 류승범 씨가 말한 대사에서 파생된 드립이다. 원래 대사는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이다. 저 대사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말장난하던, 호이호이하는 둘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생각이 꼬리를 물어 내가 지금까지 실제로 봐온 사람들과 멍청한 둘리인 내가 생각나 조금 꽁해지곤 했다. 지금 와 곱씹어보면 멍청한 둘리가 아닌 히어로 둘리가 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 성격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친해질수록 말이 없어진다. 이상해 보이지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그런 말 있지 않나? 비슷한 맥락이다.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간이고 쓸개고 떼줄 듯이 ‘호의’를 베푼다. 주변에서 나만 피해 보는 성격이라 했지만 나는 알아버렸다. 내 ‘호의’에는 아마 둘리의 ‘호이~’처럼 마법 같은 힘이 있다. 나에게 도움 되지 않는 사람을 거르는 힘.
나는 글쓰기가 마음속 깊숙한 상처를 위로하는 수단이라고도 생각하기에 덮어만 둔 상처를 살짝 열어보자면, 가장 처음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 친구는 자그마한 체구와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가져서 조폭 마누라 같은 나와 다른 그 친구가 신기하다는 이유로 가까워졌다. 그렇게 한번 친해지면 나의 ‘호의’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친구는 그걸 권리로 착각했다.
“쟤가 너 생리한 거 남자애들한테 말하고 다닌 거 알아? 남자애들끼리 말하던데?”
나와 친하지도 않은 반 친구가 말해줬다. 나의 초경 사실을 한창 사춘기 남자아이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 한없이 잘해준 죄밖에 없는데, 나는 멍청한 둘리였다.
다음은 고3이었다. 한 친구가 울고 불며 전화했다. 그 친구는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위로가 필요했다. 친구와 만나 몇 날 며칠, 밤낮 가리지 않고 위로와 응원을 해줬다. 약 2주간 나의 ‘호의’였다. 3년간 나와 친구 관계로 지내주면서 나도 이 정도 호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변함없이 친구는 나에게 위로와 응원을 요구했다. 슬슬 지쳐갔던 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려고 다른 화제를 던졌다. 그러자 그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걔가 그땐 어떻게 했냐면…. 진짜 최악이지? 그렇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맞장구만 계속 치며 내 영혼은 빨려 나갔다. 이번엔 누르면 위로와 응원이 나와야 하는 자판기 같은 둘리가 되었다.
몇 년간 이 사람들 말고도 나를 ‘둘리’로 만든 사람들이 많다. 아마 친해지면 다 퍼주는 내 성격 탓인 듯하다. 그렇다고 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쉽지 않다. 노력해봤는데 안 되기도 하고, 이 각박한 세상에서 정을 가진 사람이 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히어로 정신’이 있나 보다.
이젠 어쩔 수 없다. 호의를 휘두르는 내 성격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상처 받기 쉽다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은 방패가 생긴 것 같다. 일명 ‘싸함 레이더’다.
싸하다고 느껴지는 사람과는 약 3개월간 거리를 유지하고 너무 친해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사이에 무조건 일이 터진다. 나에게 싸한 느낌이 들면 다른 사람에게도 싸하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이 레이더를 믿고 실행시켜 봤는데 적중률이 100%를 달성했다. 이 정도면 임상실험을 거쳐서 팔아도 되겠는데?
드디어 나는 진정한 히어로 둘리가 되었다. 호의와 방패를 가진, 더는 멍청하지 않은 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