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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 Feb 05. 2024

신사


알람을 연장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드러누워 이마에 손을 짚을 뿐이었다.

그렇게 또 하루구나.


분침이 몇 번 옮겨질 즈음,

팔을 길게 뻗어 몸을 일으켰다.

커튼에 가려져 밖이 보이지 않았지만 명확하게 오늘은 햇살이 보이지 않을 날이라는 걸 알았다.


처방받은 약을 남은 커피와 함께 입에 넣는다. 목을 넘어가는 쓴 기운에 비릿한 그 표정을 다시 기억해 낸다. 너의 겨울 차림새가 궁금하다는 글을 끄적이곤 했는데 그게 현실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어떤 시간들이 잘못 조각 맞춰져

우연이란 게 이뤄지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약까지 삼키고

마지막 조각을 스스로 떼버렸다.

더 이상 그런 시시한 이야기 따위는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단 걸 모르는가.

현재의 문제는 여기저기 해져서

노트북이 튀어나오는 가방 따위라던가

점심에 따뜻한 라떼를 마시면 잠이 안 올까

같은 것 들이었다. 아, 어제 너와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도 있는 것 같은데.

해진 노트북 가방과 귤 한 개와 함께 가방에 챙겨 넣고 양말을 마저 신는다.


차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아 골목을 벗어나니 그제야 미뤄둔 어제의 생각이 나를 잠식시켰다.


다시 돌아가 보자면 사실 눈을 마주하느라 너의 겨울 차림을 볼 수 있던 그 몇 초의 기회를 놓쳐버린 건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눈이 굴러가며 인사가 튀어나와 아무리 생각해도 웃길 지경이다.

수염이 많이 자라 있었다.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곱슬머리와 떨어져 있던 수염이 어느새

곱슬머리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아직도 하루에 영화를 세 편이나 혼자 보며

생각에 잠겨 있으려나.

영화를 대하는 너의 모습은 신사 같았다.

‘신사’라는 단어를 붙이는 사람의 기준은 모르겠다만 너는 그 단어가 꼭 들어맞는다.

날카롭지만 분명하게 부드러운 눈빛으로

먼지가 낀 스크린을 곧게 바라본다.

잠깐 다리를 꼬며 동시에 가는 손가락으로

턱수염을 몇 번 만진다.

시선은 결코 스크린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을

참으로 빌리고 싶을 정도였다.

고작 3시간 남짓이었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내가 가끔 찾아가 머무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를 소중히 대하는 사람을 만난 것,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지금은 신호가 바뀌었다.


복잡한 문단들과 괄호들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잡아 억지로 마침표를 툭 찍고

액셀을 밟았다.


너는 겨울에도 그 셔츠를 입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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