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아빠의 퇴직
수능의 좌절로 원하지 않는 대학에 들어가 편입을 위해 학점과 스펙에 목매었고, 도서관에 처박혀 꼬박 3년을 보내고 난 뒤 약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학교가 정상화가 될 때쯤 나는 암 환우가 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으니 이런 삶의 미련이 날 살리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렇지만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삶이란 게 산 넘어 산이구나
정든 도시를 떠나 본가로 돌아와 직장을 잡고 월급이란 것을 받으며 조금은 잔잔한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내가 엄마에게 말했던 것이 있다.
“살면서 지금이 제일 좋은 거 같아. 학교에서 시험도 안 봐도 되고 엄마 아빠도 아픈 곳 없고 오빠도 직장 생활 잘하고! 나 지금 너무 만족해!”
원래 이런 말들은 복선이 되는 법이다.
그 말을 한지 불과 하루 만에 물기 어린 목소리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담담하게 전했다.
“회사에서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어. 근데 아빠 못 버틸 거 같아. 사직서 내야 될 거 같아. 이미 통보받은 사람들 열다섯 명 중에 열명은 나가기로 했대.
아빠도 이 달 말까지 정리하려고” 장기근속 삼십 년을 단 일 년 남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아빠 회사는 매번 이런 고비를 주었다고 한다. 어떨 땐 열명, 어떨 땐 다섯 명.
우리가 자라는 동안 부모님은 아무도 모르는 악마의 줄다리기를 삼십 년 겪으신 거였다. 우리가 다 크고 나니 밝히는 현실이었다.
이제 그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냥 수고했다는 말만 돼 내었다.
그리고 퇴근하는 엄마를 맞이하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족발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반도 먹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아빠가 말했던 이번 달 말까지 불가 삼주정도가 남은 시점에 나와 오빠는 바빠졌다.
비상금 통장을 털어 아빠의 마지막 월급을 준비하였고 현수막과 상패까지 준비했다.
엄마도 아빠의 퇴직을 대비한 생활비 계산에 정신이 없었다. 엄마는 그저 삼 개월짜리 알바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빠가 모든 짐을 들고 집에 들어온 날 우리 네 가족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모든 것이 변했다.
아빠는 주말에만 집에 오는 주말아빠(?)였다. 일주일 내내 집에 있는 것도 어색한데 아빠는 24시간을 집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하듯 아빠는 자기에게 3달의 유예시간을 요구했다.
주어진 세 달 동안은 나는 무조건 아빠 편을 들어야 했고, 엄마도 아빠에게 다시 일을 하라 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리모컨은 당연히 아빠 차지였다.
우리는 삼십 년 가까이 일한 아빠를 위해, 삼십 년 만에 집에 들어온 아빠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존중했다.
그 사이 나는 집에 보탬이 되기 위해 주말 알바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직이 끝나면 알바 면접을 보러 다녔다.
사는 곳이 그렇게 대도시는 아닌지라 알바 자리가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공고 뜨는 곳에 모두 지원해 보며 그렇게 발품을 팔았다.
그리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오빠와 사이가 매우 좋아졌다. 일주일에 다섯 번을 통화했다.
원래 생사 확인도 엄마를 통해 하던 우리였는데 비밀리에 접선하듯 아빠의 소식을 전했고 당분간 아빠의 안정이 제일이라는 항상 같은 결론을 내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역시 엄마는 달랐나 보다.
퇴직금 이야기를 마무리하자며 아빠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댔고 나는 이런 엄마를 오히려 말렸다.
하지만 결국 엄마는 아빠의 휴대폰을 보고 열지 말아야 할, 아니 좀 더 빨리 열었어야 할 판도라를 열었다.
퇴직만이 우리에게 다가온 불행이 아니었다.
아니 퇴직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