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4남 2녀 중 넷째였다.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지신 왕큰아빠, 사업으로 인해 제주도로 거취를 옮기신 큰아빠, 각 종 사건 사고가 난무하던 큰고모, 그리고 아빠와 밑에 동생 둘....
아빠는 그런 할머니에게 유일한 자랑이자 버팀목이었다. 공부를 잘했던 아빠는 그 당시 명문이었던 대학을 진학하셨고 다른 남매들에 비해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회사에 다녔던 터였으므로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할머니집에 일이 생기면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우리가 내려가야 했다.
강원도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는 경남 창녕까지,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부터 초보운전 딱지를 채 떼지도 않은 아빠 차에 올라타 그 여정을 즐겼다.
삼십 분 거리에 있는 막내 삼촌은 뭐 하고 맨날 우리가 내려가?라는 의문은 고등학생이 되어 내신에 목숨을 걸기 시작하서부터 들었으니
다소 늦은 감이 없진 않았을 터.
우리는 그런 이유를 아빠의 이름을 탓했다. 첫째가 아닌데 이름에 ‘한 일 一‘ 이 들어가면 그 집의 장남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후부터는 ’ 다복‘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직관적으로 복을 많이 받자는 말이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전화가 오면 “우리 집 다복”이라는 알람이 울리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우리 집 다복”이라는 알람을 기피하곤 했다.
아빠에게 오는 전화가 대부분 마주 보고 하긴 힘든 이야기였을 뿐 아니라 이번 사건에 대한 거래내역서를 요구하고 차용증을 쓴 이후로는 더욱 서먹해졌다.
그 뒤로 나는 예전처럼 시시콜콜 아빠에게 오늘의 일을 보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오빠가 집에 오겠다고 해도 엄마는 오지 말라며 말렸다.
오빠가 독립하면서 한 달에 한번 집에 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엄마였는데 현재 자신이 너무 힘들어 맞이해 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물론 나는 출근하면 쉽게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지만 특히나 대학병원 안에서의 삶은 일분일초의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을 잊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장실도 갈 때마다 보고를 하고 오분이 넘으면 호출이 온다. 때문에 개인사로 인한 전화를 받기란 사실 어렵다.
더욱이 가운에 전화기를 넣어 두면 그 흔한 워치조자 없는 나에겐 진동을 느끼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다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시간 나면 전화 줘.”
딱 한 문장이었다.
화장실을 간다는 빌미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아빠가 시골로 간다고 하며 짐을 싸들고 내려갔다는 것이다.
아빠에게 전화했다. 우리가 모두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 잠깐 떨어져 시간을 갖기 위해 일주일 동안 시골에 내려간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집은 관리가 되지 않은 채 엉망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친척들이 많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푹 쉬고 머리를 비우고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퇴근시간이 다 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있을 때 엄마에게 무수히 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문자로 갈음하던 엄마였는데, 무슨 일일까.
아빠는 시골 간다고 했는데.
엄마가 아빠한테 지금 전화하라고 했다. 나의 퇴근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라고.
이상했다.
아빠한테 전화했다. “비도 오는데 멀리 안 갔으면 나 데리러 와. 나 우산 안 가져왔어 “
알겠다 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아빠 집에 왔으니 택시 타고 집에 오라고 했다.
택시비는 사치이므로 퇴근할 때 택시를 탄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했다.
아빠 손이 타들어가다 못해 쪼들어가 있었다.
엄마가 애가 타던 상황에서 전화를 받지 않은 건 나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