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엄마 없는 여행에서 만난 엄마
엄마에게는 가족여행의 기억이 얼마나 있었을까.
어린 나에게 '가족여행'이라는 말은 늘 남의 이야기였다.
텔레비전 속 장면 같았고, 친구들에게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단어를 떠올리면 늘 기억보다는 감정의 덩이들이 울렁거렸다.
가족여행에 대한 기억이 딱 하나 있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얕은 물에서 투망을 던졌고, 나는 튜브를 타고 놀았다.
머리에 꽃장식이 가득한 수영모자를 쓰고 말이다.
다리 아래에 시원한 물속에 수박을 넣어뒀는데 그 수박이 물에 떠내려갈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난다.
몇 살 때였는지, 거기가 어디였는지도 모를 아련한 기억이다.
그런데 기억 속 장면 안에는 엄마가 없다. 분명 함께 갔을 텐데 엄마의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속상했다.
아빠의 투망, 꽃장식이 달린 수영모자, 수박..
그런 것들 말고,
엄마를 기억하고 싶은데 말이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고, 아빠가 재혼을 하고 나서도 우리는 가족여행 같은 건 가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나가서 외식하자고 하면 마당에 상을 차리라고 하고, 놀러 가자고 하면 옥상에 텐트를 치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나가면 부부싸움의 결말로 돌아오곤 했기에, 나중에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도,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가족여행의 기억이 하나 생겼다.
벌써 10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일이 아직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아빠가 이모들을 세부로 초대한 일이 있었다.
아빠 덕분에 사랑하는 나의 이모들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리조트에 묵으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니 가족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편안한 것이구나 처음으로 느꼈다.
그 해가 아빠가 칠순이 되던 해였는데, 부산이모가 축하글을 멋진 붓글씨로 써서 붙이고, 맛있는 음식들을 한 상 차려 아빠의 칠순 생신을 함께 축하했다.
내게 이 여행을 더 아름답게 한 것은 숙소에서 바라본 밤하늘의 달무리였다.
둥글게 번진 빛이 하늘에 머물러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여행의 기억이 아니라 시간이 멈춘 장면 같았다.
그날의 달무리보다 크고 멋진 달무리를 아직까지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나는 그때의 행복을 그 달무리 안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나 보다.
달무리가 지면 다음날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정말로 다음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질퍽질퍽한 흙길마저 즐겁게 느껴졌다.
달무리 안에 가둬 둔 나의 행복이 모든 것을 즐겁게 했다.
엄마에게도 이런 밤이 있었을까.
달무리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웃을 수 있는 밤이.
차를 타고 가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난 일도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나 혼자였으면 무서웠을 일이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있으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작은 페디캡에 덩치 큰 이모부와 배선생님이 끼여서 타고 가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날의 웃음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지,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웃어도 되는 건지 몰라서 더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가족다움, 편안함, 행복 그 단어들이 물컹한 덩어리가 되어서 내 마음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세부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나는 정말 많이 웃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우리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웃고, 편안하고, 가족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따뜻해졌을 때 이모는 아빠에게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행복이 가장 충만할 때, 가장 아픈 이름이 불쑥 떠오른 것처럼.
"형부, 돈을 벌려거든 좀 일찍 벌어서 우리 언니 돈벼락이나 한번 맞고 가게 해주지.. 그렇게 고생만 하고 가게 했는교..!"
아빠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라고 하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아까까지 나를 웃게 하던 소리들이 잠시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접시 부딪히는 소리도, 우주가 잠깐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지금 여기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순간 우리 모두가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엄마에게 미안함을 가지는 순간.
마음속 돌덩이가 이모의 말 한마디에 본색을 드러낸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그 실체를 숨기지 않고 자꾸 입 밖으로 꺼내놓으면서,
돌덩이는 점차 작아지고 부드러워지고 폭신해졌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엄마를 가슴에 품고 여행을 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엄마가 있었다.
가족여행은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엄마가 없어서 슬펐던 여행이 아니라, 엄마를 가슴에 품고 돌아온 여행이었기에.
인생도 한 번의 여행이라면,
나는 이 여행을 정말 멋지게 기록하고 싶다.
나의 여정에 엄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이 고백을 꼭 하고 싶다.
"엄마, 이제야 알겠어.
가족여행은 특별한 곳에 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가슴에 품고 함께 돌아오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