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사유] 마침표를 찍지 못한 마흔하나의 삶에게
말기암의 고통 속에서 상연은 존엄사를 선택한다.
마지막 밸브는 스스로 열어야만 했다.
그 밸브를 열고 약물이 투여되면 30초 안에 혼수상태에 빠지고 곧 심정지가 온다.
은중이 말했다.
"상연이가 밸브를 열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마지막 장면의 이야기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수없이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에게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엄마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말해주지 않았다.
상연은 자신에게는 두 가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살로 세상을 떠난 오빠의 죽음,
그리고 병으로 고통받다가 간 엄마의 죽음.
그러던 중 스위스를 알게 된 후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존엄사.
자신에게 또 다른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상연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엄마는 '예고 없는 죽음'을 맞았다.
죽음이 바로 뒤에 온 줄도 몰랐기에
엄마는 두려워할 틈조차 없었다.
죽음으로 삶은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모른 채 살다 갑자기 죽는 것이 정말 더 행복한 결말일까?
사람들은 엄마가 몰라서 다행이라 했지만, 사실 엄마는 몰랐기에 가난의 무게를 온몸으로 버텼다.
엄마가 만약 알았더라면, 스스로 몸을 더 소중히 돌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지 않은 것인가 말이다.
그랬다면, 엄마는 세상을 눈에 더 간절히 담았을 것이다.
어린 아들과 딸 생각에 많이 애달프고 슬펐겠지만,
그만큼 더 사랑하고, 더 많은 시간을 나누었을 것이다.
상연은 죽음을 받아들였고, 준비했고, 선택했다.
그렇게 삶의 끝맺음을 스스로 했다.
엄마도..
그것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지 않았을까..?
엄마의 시간은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마흔한 살에 멈추었다.
나는 그 시간의 끝을 이어, 마흔셋의 지금을 살아간다.
내게도 언젠가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겠지.
마침표 없이 가버린 엄마 덕분에 나는 매일을, 유언처럼 살게 되었다.
내 꿈은,
죽기 전에 내가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가능한 많이 이해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에 스스로 '괜찮은 삶을 살았다' 회고하며 가는 것이다.
내 꿈이 삶의 중턱이 아니라, 삶의 끝자락에 있는 것을 보면
엄마의 죽음이 내 삶에 얼마나 큰 흔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가 피우지 못한 꽃을 내가 소중히 가꾸어서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을 피워 엄마에게 주고 싶다.
겨울처럼 살다가 봄의 문턱에서 세상과 이별한 엄마에게,
나는 뜨거운 여름의 꽃을 선물하고 싶다.
엄마가 찍지 못한 삶의 마침표를
내가 곱게 찍어, 엄마에게 가져가겠다.
엄마에게서 이어온 이 시간이
내게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다.
나는 이제,
그렇게 그리워하던 엄마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만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