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단절] 말 못 한 슬픔이 심장에 새겨진 기록
작년,
첫째 아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를 잊을 수 없다.
내가 엄마를 잃은 나이, 만 나이로는 여섯 살이었다.
나는 엄마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 말은 곧,
아이가 나와 함께한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지금 떠난다면 내 아이 역시 나를 잊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나는 건강하고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도,
꼭 무슨 일이 생겨 아이들 곁을 떠날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 무서운 생각들이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내 무의식 속의 나는 아직 여덟 살에 멈춰 있었다.
엄마를 잃은 바로 그 나이에.
그래서 내 아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엄마로서 무엇을 해 주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신천국민학교 1학년 4반.
나는 한글도 모르고 입학했다.
오빠를 너무 많이 가르쳐 학교에 보냈더니 오빠가 금세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도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 보냈단다.
덕분에 받아쓰기 시험에서 단 한 번도 백 점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1학년 담임선생님이 어렴풋 떠오른다.
교직에 선 지 얼마 안 된 젊은 여자 선생님 있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채 국민학생이 되고,
입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엄마를 잃은 가엾은 제자였다.
십여 년이 흐른 후,
고모가 우연히 그 선생님을 만났다고 했다.
선생님이 고모를 먼저 알아보시고, 나의 안부를 물으셨단다.
다시 생각해도 참 고마운 일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잦은 조퇴를 했다.
국민학교 1학년의 짧은 학교생활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매일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아팠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숨이 가빠지는 괴로움이었다.
병원에 가도 통증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고모가 매번 학교로 날 데리러 왔고,
고모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여덟 살의 내가 너무 가여웠다.
아빠가 엄마의 사진을 찢어버린 그날,
엄마가 나에게 금기가 되어버린 바로 그날부터
슬픔과 그리움을 다 풀어내지 못한 어린아이는
눈물 대신 심장의 통증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학년이 되어 새엄마가 오고 난 뒤에도
심장이 아프다며 종종 조퇴를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여덟 살에 잘못된 이별을 배웠다.
이별의 슬픔은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
슬프지만 참아야 하는 것,
꾹꾹 눌러 담아
가슴 저 깊은 곳에 넣어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엄마와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채 새엄마가 들어왔다.
새엄마에게 예쁨 받기 위해 나는 그 이별을 더 깊은 곳에 묻었다.
하지만 나는 새엄마에게 사랑받지도 못했고,
엄마를 저 깊은 곳에 묻어버린 바람에
결국,
엄마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른여덟.
둘째 아이를 뱃속에 품고서야 알았다.
그것이 내 삶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는 것을.
이 생명만큼은 나처럼 '잘못된 이별'을 배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딸을 지키고 싶다는 본능은, 30년 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던 여덟 살의 나를 비로소 깨웠다.
임신기간 내내 깊은 내면과 마주하며 끝날 것 같지 않은 눈물의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을 만큼 울고 싶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원망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어린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서른아홉의 2월.
딸을 품에 안는 순간,
끝날 것 같지 않던 태풍이 잦아들었다.
마흔셋이 된 지금도 내 마음에는 가끔씩 비가 내린다.
다만, 이제는 태풍 같은 거친 폭우가 아닌,
잠깐의 소나기 같은 것이 말이다.
나는 이제 이별을 안다.
이별은 본디 슬픈 것이고,
슬픔은 반드시 슬퍼해야만 한다.
피하면, 결국 병이 나고 만다.
나는 엄마와 잘 이별하기 위해 엄마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의 이별이,
아름다운 그리움의 기억으로 남도록.
우리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