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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는 한걸음 반

헛헛한 나는 헛헛한 나다

by 우인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찾는다. 밤부터 아침 사이 세상이 나에게 보내온 각종 알림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스마트폰은 충전을 위해 항상 책상 위에 올려놓기 때문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한다. 그 거리는 한 걸음 반. 나는 한 걸음 반의 거리를 걸어 나에게 도착한 갖가지 소식들을 읽는다. 요란 떠는 광고 알림부터 얼굴을 마주한 지 5년도 지난 SNS 지인의 활동 소식까지,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앞다투어 쏘아댄다. 여드름 짜는 것처럼 알림들을 하나하나 지우고 나면 비로소 나의 스마트폰은 한적해진다.


한편 나의 스마트폰에서의 인기척은 매우 적은 편이다. 애초에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고, 있는 친구들하고 자주 만나는 편도 아니다 보니 나를 찾는 소식은 꽤 적다. 전화든 카카오톡이든 늘 한적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은 소통을 하라고 만든 것인데, 나는 일방적으로 소식을 수신하는 것에만 더 치중되어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이러한 사실을 싫어했다. 스마트폰의 고요함에서 전해지는 외로움이 물론 첫째였지만, 그 외로움에서 피어오르는 자괴감이 가장 두려웠다. 주말에도 나를 찾는 연락이 없는 것이, 친구가 찍어준 사진 하나 없어 혼자로 억지로 찍은 셀카를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하는 것이 괴로웠다. 훗날 이 시절을 돌아볼 때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당장 나의 스마트폰의 꺼진 화면에서 비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때는 친목 동아리에도 가입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미숙했었던 나의 사회성과 그로 인해 내성적이기만 했던 성격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데 장벽을 만들었고, 나는 그 장벽을 끝내 넘지 못해 한 달도 못 지나 바쁘다는 핑계로 탈퇴했었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비쳤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어설퍼서 창피한 기억이 많다.



이렇듯 친구가 적다는 사실은 한때 나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하지만 요즘은 이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그 자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이와 위치를 생각해보았을 때, 이 자리에서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 성격이 더욱 나아지거나, 혹은 다수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나의 성격은 이미 고착화가 되었으며, 따라서 나의 성격으로 인한 내적인, 외적인 변화는 더 이상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더 발버둥을 쳐봐야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 하는 것과 같았다.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그 자체가 나이자 나의 일반임으로 인식하기로 마음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꽤 효과가 좋았다.


물론 아직도 인스타그램 등으로 친구들의 사교활동을 보게 되면 가슴 한쪽이 시큰거리는 건 여전하다. 누군가는 같은 시간 속에서 나와 달리 신나고 북적한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에 질투심과 약간의 자괴감을 느낀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감정들이 만들어낸 늪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리는 일은 이제는 없다. 나는 지금 내 방의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지, 그 파티에 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부수고 싶었던 타인과의 벽을 이제는 굳이 건드리지 않는다. 즐거운 너는 즐거운 너고, 헛헛한 나는 헛헛한 나다. 그래서 나는 화면 속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미소에서 눈을 떼고 마음의 거울을 바라본다. 그럼 거울 속엔 지겹도록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별 수 있을까, 나는 그 얼굴이 내미는 미소를 일부러 따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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