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탕처럼 혹은 공식처럼
대학교 4학년이 된 지금, 나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퍽 늘어났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전부 취업으로 귀결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의 최대의 미션이자 목표인 취업, 나는 지금 취업이라는 산에 오르고 있다. 정상이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 채 좁디좁은 길을 무심코 오르고 있다.
사실 나는 취업에 관해 여전히 모르는 것이 정말 많다. 심지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모른다. 광고와 홍보를 배우고 있지만 진로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뚜렷한 목표를 정하지 못했다. 눈앞에는 여전히 짙은 안개가 가득하다.
나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광고홍보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나는 하필 광고와 홍보를 배우고 싶어 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만, 정작 스스로도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할 수 없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문득 배우고 싶어 졌으며, 문득 직업으로 삼고 싶어 졌다. 그 생각의 근원을 찾으려 했지만 항상 끝에 닿지 못했었다. 어쩌면 동기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것들이 결국 내가 어린 시절 단단한 목표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코흘리개 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당시 수많은 어린이들이 으레 그랬듯 화가나 경찰, 소방관 등등 매달마다 정기적으로 교체됐었다. 뭔지도 모르고 그저 외관상 멋져 보이는 것이 곧 나의 장래희망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초등학생 시절부터 특별한 계기가 생겨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장래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무언가에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디에 깊은 흥미를 가지는 성격도 되지 못하여 단단한 목표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기엔 매우 척박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등록을 했으니까, 엄마가 보내줬으니까 태권도를 배웠고 수영을 배웠으며, 바둑을 배우고 수채화와 기타를 배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중에서 나의 재능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하나같이 결과물이 무언가 부족하고 어설펐다.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문화적인 재능은 쉽사리 발견되지 못하였고, 결국 엄마는 기타 대신 방정식과 함수를 가르치는 학원에 나를 등록하며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지금에 와서 어떤 목표를 세우기엔 괜히 큰 부담감이 생기는 것 같다. 물론 나이는 20대 중반에 머무르고 있지만, 으레 미디어에서 일컬어지는 청춘의 도전 의식은 고사된 채 사회가 지정해놓은 삶의 순서에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적당히 만족할 수 있는 기업에 취직하여 평범한 사회인의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무난히, 그리고 무탈히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가끔은 이러한 삶의 길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 살아야 100년 안팎인 인생을 너무 맹탕처럼 혹은 공식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디서 새로움을 찾아야 할까, 찾을 수 있는 새로움은 많을지라도 그중 어떤 새로움을 선택해야 할까, 이 새로움이 나의 삶의 순서를 얼마나 지연시킬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현실에 대한 의문이 그러한 모든 아쉬움을 완전히 뒤덮는다. 결국 하라는 대로만 하자, 아쉬움은 대개 10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누가 보면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지만.
삶의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에는 분명 나는 나의 현재를 후회할 것 같다. 좀 더 도전하고 나서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바꾸지 않고 있다.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나를 수도 없이 양보시키는데, 이 것 하나쯤은 현재의 내가 양보하지 않고 버텨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도 과거의 나로부터 파도같이 쏟아지는 후회도 감당하기 힘든데, 미래의 나까지 전부 돌봐주긴 힘들다. 후회할 거면 후회하라지. 현재의 나도 한숨 돌릴 공간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