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000부터 배웠습니다
사뭇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숟가락 하나를 치켜들어 앞으로 내민다. 바로 앞에 앉은 남자의 시선이 숟가락으로 향하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좋았어’
마치 유리겔라가 염력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기적 같은 초능력을 발휘하기 전 마지막 심호흡을 삼키듯 나도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어떤 기적을 기대하며 앞에선 남자의 눈을 응시하고는 가볍게 말을 건다. 기적을 부르는 주문을 외듯
“명우(가명)야, 이건 숟가락이에요?”
“…”
“다시 물어볼게요. 이건 숟가락이에요?”
“…”
“…”
역시 기적은 기적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함께 생활한 지 이제 1주일 정도 지난 명우는 등교하면서 인사도 잘하고,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절레절레 흔들면서 나와 활발하게 소통하는 친구이다. 특히 자기보다 장애 정도가 심한 친구가 이동 중 복도에서 딴 길로 새면 얼른 달려가 손을 잡고 데려오는 고마운 학생이기에 특수학교에 막 들어온 신출내기 같은 나에게는 빛이요, 소금 같은 존재이다.
그런 명우에게 네/아니요 같은 긍정 부정 표현을 가르쳐 좀 더 다양하게 소통하고 싶었던 나는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각설이처럼 오늘도 명우 앞에 숟가락과 포크를 번갈아 꺼내 들며 눈앞에 있는 것이 숟가락이 맞냐고 줄기차게 묻고 있다.
하지만 명우는 아리송한 미소만 지을 뿐 도통 입을 열지 않는다. 몇 초 되지도 않는 정적의 무게가 점점 더 불어나 명우의 입을 짓눌렀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 명우의 모습에 내가 짧은 한숨을 내쉬자 치켜든 숟가락은 맥없이 고꾸라졌다. 마침 수업 종료를 알리는 학교 종이 울렸고 명우는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놀잇감이 모여있는 교실 한쪽 매트 위로 뛰어가 버렸다. 내 마음도 모르고….
사실 내 질문에 기적처럼 명우가 “네”라고, 말하거나 포크를 보여주며 이게 숟가락이냐고 물어보면 “아니요”라고 말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질문에 적절한 답변이 아니어도 좋다. 그냥 “우”도 좋고 “악”도 좋으니 무슨 말이라도 입 밖으로 내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을 뿐이었고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만 있는 명우의 모습이 슬금슬금 미워지기까지 하려던 찰나였다. 다행히 “너도 적당히 좀 해라!”라고 말해주듯 알맞게 울려준 종소리 덕에 그 마음은 은근슬쩍 자리를 떴고 빈자리에 남은 안쓰러움만이 명우를 향하고만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퇴근 전 명우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정리하면서도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내 속마음은 불쑥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날 저녁 8시 새로 등록한 보컬학원에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유명 아이돌 보컬 특강 경력에 방송 경험이 다수 있는 선생님이다 보니 학원에 가는 내내 기대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몇 마디 인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나를 녹음실로 안내했다.
귀가 약간 먹먹해지고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크게 울려대는 색다른 공간이 신기함보다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준비한 노래 불러보시죠.”
“아! 지금이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홀린 듯 마이크 앞에 섰다. 이윽고 전주가 흘렀고 나는 전주 리듬에 맞춰 감정을 끌어올린 뒤 아주 당당하고 감미로우며 부드럽게 첫 음을 놓쳐버렸다.
“다시 갈게요.”
“네”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머리가 하얘지면서 알고 있던 가사들마저 나 잡아보라는 듯 머릿속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잠시만요.”
휴식을 요청하고 심호흡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보컬 선생님을 흘깃 보았다. 음향 장비를 점검하고 컴퓨터 화면 속 무엇인가를 클릭하기도 하며 분주해 하는 모습은 나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 시작할까요?”라는 말에 나는 무슨 정신으로 불렀는지 모르게 녹음을 마쳤다. 녹음 후 MR이 벗겨진 상태에서 내 목소리를 듣는 경험은 마치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겨진 내 몸을 보여주는 것처럼 치욕적(?)이었고, 노래를 듣는 선생님의 웃음, 한숨, 시선 처리 하나하나에 나도 모르게 괜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게 독이 된 것인지 내내 경직된 자세로 수업을 들은 나는 ‘평생 해도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미 결제한 수강료를 일부라도 돌려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수고하셨어요! 원래 첫날이 제일 어려워요.”
수업 종료를 알려주는 말씀에 “환불은 됐고 일단 나가자!”라며 도망치듯 학원을 나와 운전석에 앉았다. 분석하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끊임없이 평가받는 듯한 옥죄임에서 탈출했다는 광복의 밤공기가 폐속을 가득 채웠다. 공기가 맛있다고 하면 믿어질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달달했다.
그러다 문득 명우가 떠올랐다. 나의 질문과 응시에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 해방감 가득한 미소를 띠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
채 일주일도 안 된 새로운 선생님 앞에서 가장 자신 없어 하는 말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명우에게도 제법 긴장되는 상황이었겠지. 내가 쉽게 뱉었던 한숨 소리를 아마 명우도 들었을 것이다. “틀려도 괜찮다.”, “자신 있게 말해보자”라고 말했지만, 주저하는 모습에 한숨부터 내쉰 나를 보며 명우가 어떻게 나를 믿고 의지하며 용기의 한 마디를 꺼낼 수 있었을지.
“젠장”
부끄러워졌다. 밤공기의 맛이 조금 탁해졌다. 얼른 집에 가고 싶어졌고, 어서 내일이 와 명우 앞에 다시 서고 싶어졌다.
아마 명우는 내일도 내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명우가 마주하는 내 모습은 조금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명우가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머뭇거려도 나는 자기만의 속도로 자라는 명우를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부터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명우에게도 또 명우와 같은 다른 친구를 만나도 그 친구가 자기만의 속도로 꽃을 피워가는 모습을 진심으로 응원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왕 특수교사가 된 거 그냥 교사도 아닌 특수교사라면 그런 멋이라도 있어야겠지.
그것만이 기다림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일깨워 준 명우라는 친구와의 만남에 대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명우야 그때 좀 부담스러웠니?”라는 질문에 명우가
“조금이요.”라고 답하는 그런 날도 기적처럼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