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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준비

by dy


옷장 문을 열어두는 것을 좋아한다. 5평 남짓한 조그마한 방에 옵션으로 설치된 붙박이 옷장. 옷장 안에 들어가 있는 옷들의 정돈감을 보는 것이 좋다. 아니 단순히 옷들의 정돈감이 좋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방의 시각에서 옷장 문이 열려 있을 때, 방을 포함하여, 옷장 안에 있는 것이 모두 어우러져 정돈된 느낌을 주는 그 상태를 좋아한다.


머지않아 계절이 바뀐다. 계절의 변화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무더웠던 여름과 달리 추운 겨울은 두 계절의 온도의 차이의 크기만큼 옷에도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옷장에는 지금까지 여름을 견디기 위한 옷들로 채워져 있었다. 세로가 유난히 긴 직사각형, 중간에는 위아래를 구분하기 위한 가로 크기만큼의 널찍한 나무 선반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계를 기준으로 한 층 작아진 두 개의 공간에는 옷걸이를 걸 수 있는 철제로 된 봉이 붙어 있으며 다음의 규칙을 따르고 있다.


위의 공간은 상의, 아래 공간은 하의

옷들 사이에는 조금의 여유를 둔다

너무 가득 차면 안 된다.


내가 정한 기본 규칙을 충실히 따르며 어찌 보면 정돈된 듯, 정돈되지 않은 듯 한 느낌을 주며 채워져 있다. 옷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아 종류는 많지 않지만, 꼭 필요한 몇 벌의 옷들로 옷장은 나름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는 그 질서를 부숴야 한다. 다시 새로운 정돈감을 찾아야 할 때다.


핸드폰에 택배 도착 메시지가 왔다. 겨울옷을 둘 공간이 마땅치 않았기에 본가에 둔 옷들을 택배로 받은 것이다. 옷상자를 열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 옷장 속 여름옷을 정리해야만 새로 온 옷들을 수용할 수 있다. 옷들의 정돈감을 부수어야 하며, 새롭게 옷장을 채워야 한다. 여름옷을 보관할 장소가 없기에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들을 먼저 정해야 한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하나하나 집으며 필요여부를 확인한다. 버릴 것. 보관할 것, 버릴 것, 보관할 것, 버릴 것, 버릴 것.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옷들은 버릴 곳에 두면서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정말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도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내 옷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정도면 필요성을 충족시켰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런 완벽하지 않은 결정을 지으면서 다시 옷을 집어 든다. 버릴 것, 보관할 것.


몇 벌의 셔츠와 몇 벌의 바지 만이 옷장에 남아 있다. 조그마한 바닥에는 여름 철 내 몸을 감쌌던, 이제는 필요 없을 수도,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것들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들어갈 수 있는 크기에는 변화가 없다. 양과 크기는 절대적이다. 이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택되어야 하고, 그 선택은 오로지 나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질 것이다.


옷상자를 열어본다. 여름과 비교해 겨울 옷은 크기도 부피도 두 배쯤 된다. 지금까지 들어갈 수 있는 양의 반을 줄여야 할 수도 있다. 새롭게 들어온 옷들 역시 선택이 필요할 것 같다. 어떤 것을 버리느냐, 내 옷장 안에 들어갈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선택을 기준을 세운다. 반년 이상 입지 않았기에 옷들의 상태와 여러 기준을 따지며 선택의 기준에 부합 여부를 옷 하나하나에 잣대를 대고 평가한다. 다시 한번 버릴 것, 보관할 것, 버릴 것, 보관할 것. 어느 것은 너무 얇다. 또 어느 것은 너무 해졌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걸러진 후보군을 옷장에 넣지만, 기준이 안일했던 탓일까? 내 규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기준을 모호하게 했던 것일까 옷장의 한계를 넘겨버렸다.


정돈감을 찾아야 하기에 다시 옷을 꺼내 바닥에 둔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옷들로 방이 어수선하다. 텅 빈 옷장과 달리 바닥에는 흩어져 있는 것들로 넘쳐나고 버릴 것과 선택된 것에 다시 구분이 사라진다.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다시 한번 반복한다. 버릴 것, 보관할 것, 버릴 것, 보관할 것.


그렇게 채워진 옷장은 내가 정한 기본 규칙을 만족한다. 위는 상의, 아래는 하의. 옷들 사이에는 여유를 둔다. 너무 가득 차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마음속에 위화감이 든다.


그래서 옷장문을 닫기로 했다. 나는 옷장 문을 열어두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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